사료이야기2011.03.11 14:32




독일인들을 따라 묶음여행으로 튀니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사하라 사막 베두인 족의 천막에서 하루를 자면서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빼곡 했던 것과 밤새 짐승처럼 울던 모래바람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지나던 도로 여기저기에 서있는 거대한 입간판에는 그들의 대통령 사진이 붙어있었고 심지어 지폐에서도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날파리 가득한 식당에선 가난
하지만 순진무구한 표정의 사람들이 전통 옷을 입고 여행자들에게 재스민 한 묶음을 1달러에 팔고 있었다. 하얀 재스민 꽃은 자운영보다도 작았지만 향기가 얼마나 강하던지 한 두 송이만 꽂아 놓아도 방안에 향이 가득 찼다. 십 수년 전에 입간판과 지폐에서 보았던 그때의 대통령이 재스민혁명으로 23년의 장기집권 권좌에서 물러났던 벤 알리 대통령이었던 것을 최근의 언론보도를 보고서야 기억해냈다.



마그레브 지역의 민주화 도미노


재스민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두 달 후인 2월엔 이집트의 무바라크 30년 장기독재가 무너졌다. 그들의 정변에서 1987년 6월민주항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우리 의 감회는 남다르다. 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듯 폭압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박종철의 죽음이 불씨가 되어 6월항쟁으로 번졌다. 20여 년 전 서울광장에서 의 날갯짓이 아주 조금씩 기류를 바꿔 이윽고 지구 저편 열사의 나라에서 재현된것은 혹 아닐까.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불모지였던 마그레브라 일컫는 북아프리카 와 중동에서의 나비효과로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이 요원의 불꽃처럼 사막을 넘어 이집트로 건너갔으며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움직임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알제리로 예멘으로 중동민주주의의 새날을 여는 도미노가 되어 도저한 장강의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다. 무릇 인간의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는 모든 관계망의 총체라는 것을 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격변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또 하나 든 생각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권 세우기에나 급급한 미국의 위상이 이미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시민혁명은 미국의 서서히 허물어지는 패권적 세계지배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전주곡은 아닌가라는.


도전 받는 미국의 패권주의


우리의 곡절 많은 현대사에도 미국의 부당한 개입은 많았는데, 그때마다 민중 들은 권력자의 의지에 반해 민족 자주를 외치며 대항했다. 6·3항쟁 또는 6·3시위로도 불리는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운동도 외피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투쟁이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고 동시에 미국의 간섭에 반대하는 의미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3월부터 시작한 운동은 6·3항쟁이라 일컫는 6월 3일에 정점을 맞았다. 개요를 살펴본다.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는 민정 이양 후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1964년 3월 24일의 학생 시위를 그 시발점으로 하고 6·3항쟁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였는데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964년 3월 24일의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를 경과한 초기 투쟁, 5월 20일의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및 5월 25일의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와 같이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는 시기의 투쟁, 6월 2일과 6월 3일의 격화된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19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정희 정권 타도비상계엄령으로 눌러


당시의 한일회담은 1961년 6월의 케네디·이케다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산물로 단순히 한일 간의 현안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간의 관계에서 의제에 오른 문제였다. 그간의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 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타결·조인·비준 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은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의 비상계엄은 그 후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7월 29 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6·3항쟁의배후엔 미국의 부당한 개입도 한몫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 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했으나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은 체결되었다. 6·3항쟁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넓게 보면 당시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구조 아래 산적해 있던 다양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된 공동투쟁이었다. 즉 박정희 정권의 폭정에 대한 항의이자 직접적 생활 문제,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굴욕적 태도와 일본의 팽창주의 및 미국의 부당한 개입 등에 반대하는 민족 자주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무바라크한정치인들에 대한 경종을


정권이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최후의 수단 으로 저항권을 직접 행사할 수밖에 없다.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가 오늘날 일종의 간접민주주의인 대의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면 거꾸로 대의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할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직접민주주의이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정권의 입장에선 무질서하고 위험하게 보이나 의사당이나 대통령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밀실의 야합에 맞서 싸운다. 정권은 자기보존과 복제를 위해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일에 솔깃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거리낄 것도 없는 광장의 시민들은 심지어 죽음마저 불사하며 자기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을 하면서 까지 대의를 위해 투쟁한다.


스웨덴식합의에 주목할 때


직접민주주의의 다른 예인 스웨덴의 시민적 합의를 살펴보자. 한국의 삼성 경제연구소가 작년 5월 선진화 지표를 중심으로 OECD 30개국을 조사한 결과 스웨덴이 가장 선진화가 잘 이뤄진 국가라고 발표했다. 참고로 한국은 23위였다. 선진화를 부르짖는 현 정부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스웨덴이 선진화의 지상 모델이 된 가장 큰 이유가 스웨덴의 사회복지제도이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스웨덴은 보편적 복지를 세계최초로 도입했다), 이를 가능케 한 제1의 요인이 수준 높은 사회적 합의문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합의 또는 공감이 스웨덴의 감추어진 리더십이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끝없이 토론하고 설득하고 협동하고 양보하고 타협해서 동의를 이끌어낸다. 최근 출간된 신필균의『복지국가 스웨덴』에 따르면 합의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 사안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구성원의 헌신과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갈등 탓에 발생하는 지체와 불안정을 사전에 예방해 오히려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와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준다고 한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스웨덴식 합의제를 낳은 스웨덴 사람들의 자기인식은중용이 최상이라는 말 속에 요약된다고 한다. 조급하고 과시적인 성과주의에 급급한 우리 정치 사회문화가 차분히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 아닐까. 세간에 논의되는 복지문제를 세금이나 예산 등 돈 문제로만 사고하는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무바라크한이들에게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스웨덴 격언을 들려주고 싶다. 이상한파와 이상폭설로 겨우내 얼어붙고 움츠러든 우리의 시린 가슴에도 봄은 오고 있다. 올해는 지구촌 곳곳에서 재스민 향기를 맡을 것 같다. 갈등으 로 점철된 우리 사회도 시민적 합의로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향기를 내뿜을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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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동영상2011.03.08 11:32


여성에게 빵(생존권)과 장미(인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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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1.02.11 09:03

글·어수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eohsgkdemo.or.kr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창궐, 거기에 신종플루까지. 올 겨울은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하필 이 시대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산채로 싹쓸이 살처분 당한 짐승들에겐 같은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정말 면목이 없다. 소 돼지 닭 오리를 사육하는 축산농가 농민들의 타들어가는 마음 또한 위로할 길이 없다. 일차적으로는 그동안의 반생명적 축산정책과 초동대처에 미흡했던 관계당국에 책임이 크지만, 넓게 보면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과도한 육식을 즐겼던 우리 모두 에게도 책임이 있다. 내남없이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그저 생일이나 명절날 올라 온 멀건 고깃국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실은 수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처럼 흥청망청 언제든지 상품으로 육류를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작 최근의 일이다.


‘죽어가는 소, 피울음 농민

주지하는 것처럼 좁아터진 사육장에서 90% 이상의 수입사료로 속성 사육되는 ‘고기’는 이미 우리와 함께했던 식구와도 같은 반려동물이 아니다. 소비자의 욕 망을 위해 소비되는 상품일 뿐이다. 풀이나 볏짚 같은 여물을 먹고 논밭을 갈며 살던 소에게 속성사육을 위해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와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로 뒤범벅된 것도 모자라 사료 안에 심지어는 같은 소의 내장 등 부산물이 첨부되기 도 했다. 애초에 좁은 국토를 감안하여 합리적인 축산정책을 썼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친환경적이고 친생명적으로 사육했더라면 오 늘의 문제는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피해가 최소한에 그쳤을 것이다. 좁은 땅에 소만 340만 마리나 되고 돼지는 1,000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숫자 다. 총인구수 14명당 한 마리가 사육되는 실정이다. 물론 생태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마구잡이 성장제일주의 정책의 직접적 피 해자는 축산농민들이지만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공장식 밀집사육의 희생물은 축산농민에 앞서 무참히 살육당한 짐승들이다. 종국에는 인간의 먹잇감이 될 하 찮은 짐승이라지만 생명 있는 존재에게 지켜야할 것도 있지 않을까. 이번 사태는 맛있는 고기를 더 많이 먹으려는 인간의 끝없는 식탐과 수익만 최대한 창출하려 는 업자들의 물욕과 이를 부추기는 산업논리 등 사슬처럼 엮어진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번 구제역 파동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살육의 공범자다. 거기에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도 심 각한 결함이 더해졌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 이 글을 쓰는 현재 구제역으로 200만 마리, 조류인플루엔자로 350만 마리의 생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탐욕에 눈먼 인간들에게 던지는 뭇 생명들의 경고

행동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육식의 종말』이란 책 에서 반생명적 식습관에 물든 인간들을 위해 대량으로 소를 길러 육식을 즐 기는 동안 생태계가 파괴되고 굶어 죽어가야 하는 제3세계 수많은 사람들에 게 시선을 돌리라고 충고하면서 인간의 잔인함과 탐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비판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소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우고 있는 한편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 조에 허덕이고 있다. 사육 가축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무자비한 환경파괴 는 지구온난화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과도한 육식을 취하는 부자나라의 절반이 비만인 반면, 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 기막히게 불공평하고 부정의 한 현실이다. 우리 모두 이번 참사를 더 잘 먹고 더 많이 벌고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오로지 성장만이 최고의 덕목이 된 인간세상에 지구촌의 뭇 생명들이 던지는 경고로 삼아봄은 어떨까.


“양키소 몰아내고 한국소 살아보자”외친‘소몰이투쟁’

농민들이 소 때문에 고통받았던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1978년 박정희 정 권의 수입자유화 조처에 의해 시작된 농축산물의 무분별한 과다도입으로 인 한 소값 폭락 등으로 농가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빠지게 되고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떨어지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985년 소값 피해보상과 미국의 농축산물 수입개방 압력 철회를 주장하는‘소몰이투쟁’등의 생존권투쟁은 6월항쟁을 거치고 1989년 2월의 여의도농민투쟁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 글에서는 여의도농민투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농민들, FTA‘전신’인 UR 반대로 자주화 눈떠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부터 시작된 GATT-UR(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진행되면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은 더욱 거 세졌다. WTO-FTA(세계무역기구-자유무역협정) 체제 확립을 시도하려는 미국 등 의 선진국 그룹과의 싸움의 초기형태 정도라고 할까. 노태우 정부는 1987년 양담 배 수입을 허락하는 동시에 잎담배의 작목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과도 하게 고추를 심게 했다. 그 결과 1988년 고추생산량이 전년대비 52%가 증가하고 근당 2,500원하던 고추가격이 1,000원 이하로 폭락했다. 이에 농민들은 1987년의 고추값 폭락과 수세제도의 불합리성 및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하 여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서 수세투쟁과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1985년 전남 무안군에서 시작된 부당 수세거부투쟁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전 국적으로 확대되어 1988년 11월 1일‘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등을 꾸리고 수 세폐지와 고추전량 수매를 위한 투쟁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나 전개하였 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수매가에 대한 국회동 의제가 실시되었고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추값은 나날이 폭락하였다. 정부의 저곡 가정책에 분노한 농민들은 국회 개원 시기에 맞춰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의도광장에서 농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3만 농민 여의도 모여 수세폐지·고추전량수매 요구

1989년 2월 13일 전국 99개 군 농민 3만여 명은 여의도광장에 모여‘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와 ‘고추생산지역대책위원회’가 함께 한 것이다. 공동집회를 끝마치고 4당 대표와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 며 저지하자 분노한 농민들은 만장이나 깃발을 달기 위해 가져 온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면서, KBS·정부 업무수행 차량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농민운동 지도자와 전민련 의장 및 전대협 의장 등 민족민주운동 세력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에서 총 458명이 연행 되어 117명 입건, 6명 구속, 9명이 불구속되었다. 농민들은 2월 25일‘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26개 군에 서 동시에 개최하면서 투쟁하였다. 그러나 편향된 언론들의 농민들에 대한 폭력성 부각과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은 농민운동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가톨릭농민회 등은 배후세력으로 지목되 어 정부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일반국민들이 공감하게 되었으며 수세인하의 성과도 이루었다. 농민들의 요 구는 수세 폐지, 고추 전량수매, 농축산물 수입중지, 의료보험제도 통합일원 화 등 의료보장제도 전면실시 등이었다.



투쟁의지 모아‘전국농민운동연합’결성

흔히‘죽창시위’로 불리는 여의도 농민 시위는 1960·1970년대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1980년대 들어서는 농축산물 수입개방 조치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농민들은 자주적 투쟁을 통해 농민의 생존권 확보 및 정당한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해 스스로 나섰으 며 이를 통해 미국과 결탁한 노태우 정권의 사대주의적이고 반농민적인 행태 를 전 국민들에게 폭로했다. 또 이 투쟁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 회 등 기존의 전국적 농민운동조직과 1980년대 하반기부터 광범위하게 결성 되기 시작한 자주적 농민 대중조직의 일부가 연합하여 1989년 3월 2일 전국농 민운동연합(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발족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 아름답다. 존귀하다. 생명있는 것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우리 스스로의 존재도 빛난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간 짐승들의 명복을 빌며, 워낭 흔들며 평화로이 풀을 뜯는 누렁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농부들의 환한 얼굴을 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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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1.02.09 10:19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어떤 이는 말했다. 이 풍진 세상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희망이라고. 자조적인 표현이지만, 그러므로 많은 것에 절망한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희망만이 남았다. 신묘년 새해, 희망세상이 시작되었다.
해마다 1월이면 떠오르는 이 있으니, 1987년 새해 벽두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이다. 그의 죽음은 KNCC 인권위, 민가협, 변협 등으로 구성된 고 박종철 고문치사 공동대책위원회를 낳았고, 이는 다시 고문추방 범국민기구로 확장되었다. 고문정권에 대해 자식을 가진 부모들을 비롯한 전국민의 공분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정권타도를 향한 응집된 결집력은 마침내 6월항쟁을 일궈냈다.
그리하여 6월항쟁 이후 인권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인권특별위원회를 국회에 설치하겠다는 다짐을 받게 했는데, 이는 공안정국 도래로 현실화되진 못했지만 그 후 20여 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적 차원의 인권전담 기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2002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박종철에게 빚을 진 셈이다. 박종철이란 무구한 청년의 피로 표상되는, 민주화를 향한 숱한 죽음의 제단 위에 설립된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인 것이다.

1월이면 되살아나는 박종철의 기억

국가인권위원회가 제 이름에 걸맞게 작동하던 시절, 짧은 시간에 유래 없이 이룩한 민주주의에 세계는 경의를 표했다. 오랜 기간 인권탄압국이었던 내 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유랑하던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인권은 더 이상 정권과의 대립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랬다. 그런데, 이루어내기는 참으로 어려웠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배워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며 단 한순간도 가꾸기를 소홀히 하는 순간 메말라버리는 존재임을.
포크레인으로 마구 파헤쳐져 형체가 사라진 강가의 모래톱처럼, 다시 원상으로 회복하기엔 그 상처가 깊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어쩌랴,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하라고 한다.

인권 수호의 선봉에 선 민변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양심수들에 대한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한 인권변호사들의 활동이 펼쳐졌다.
이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사건을 공동 변론한 것을 계기로 1986년 5월 19일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1970년대에 정치적 사건을 변론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던 중견그룹과, 1980년대에 노동사건 등으로 변론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던 젊은 변호인들의 결합이었다.
조준희, 강신옥, 이돈명,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박원순, 조영래 변호사 등이 주축이 되어 1987년 6월민주항쟁 무렵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맡아 인권보호의 선봉에 선다. 권인숙 씨에 대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씨 고문 사건의 폭로와 변론을 비롯하여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망원동 수재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말>지 보도지침사건을 담당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1985년부터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에 인권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인권보고서를 발간하여 주요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세상에 알렸다. 인권보고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포괄하는 인권백서였다. 이들은 1987년 6월항쟁을 이끄는 구심체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주세력의 많은 희생과 오랜 노력의 결과, 1988년 제6공화국에 들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게 됨에 따라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변론 활동에서 더 나아가 전반적인 법 제도와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조사·연구와 대안 마련이 요청되었다. 또 한편으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신진 변호사 층이 대거 배출되었다. 억압의 소산인 인권사건에 대한 공동대응 특히 조직적 변론의 필요성 등 시대적 요구와 조건에 부응하여, 정법회가 발전적으로 해소되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신진 변호사 층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던 청년변호사회와 함께 1988년 5월 28일 드디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창립되었다.

이돈명·한승헌·홍성우·조영래·박원순 등이 주축

민변 창립이 가지는 의의는 첫째, 변호사 업무의 개별·분산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단점을 극복하여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에 대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토록 하였다는 것과 둘째, 전체 민주화운동세력 안에서 법률가단체로서 전문성과 합리성을 살려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위한 비판과 건설적인 대안 제시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89년에 악법개폐의견서를 발간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개폐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과 임수경 전대협 대표 방북사건을 변론하고, 5·18 진상 규명·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거리시위(1995년 10월 16일), 안기부법·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항의농성(1996년 12월 30일) 같은 집단행사에도 참여 했다.
그 후 2002년 11월에는 『한총련을 위한 변론』을 발간하였으며, 특히, 세계인권선언 선포일을 기념하여, 우리 사회의 인권상황을 총점검 하는 한국 인권보고대회 및 토론회를 개최해왔다. 또 격월간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을 1998년 1월부터 발간하였다. 이 책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발간된 반년간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과 1996년 8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발간된 월간지 [이달의 민변]의 맥을 잇는 것으로서, 민변 회원들의 활동 결과와 더불어 외부 인권단체의 자료, 법학자·인권운동가의 글을 함께 게재함으로써 법률·인권지의 역할을 했다.
사업회 소장사료 중 [민변 6개월 회고]에 의하면 대내적으로는 리영희, 윤소영 교수 등을 초빙해서 강연을 들으며 매주 금요일 노동운동, 통일론 등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를 10여 회 개최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대외적으로는 박종철, 권인숙 손해배상 사건들과 국보법 위반 등을 변론하였고 양심수 공청회를 열기도 하면서 각종 성명발표, 조사활동,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민변이 발행한 월간지 [이달의 민변]은 민변의 당시 활동과 관심사를 소상하게 보여준다. [민변백서-민변 10년의 발자취]도 민변 10년의 활동을 담고 있는 사료다. 대한변협에서 인권위원으로 참여했던 민변 주체들이 작성한 [인권보고서]도 주요사료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세상, 찬란한 봄 기다릴 터

지금 이 나라는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태다. 원활히 움직여야할 기와 혈이 여기 저기 막혀 체하고 울혈이 들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불통을 넘어 전쟁 직전의 파탄에로 이르렀다. 못가진 자들은 아무런 출로도 마련되지 못한 채 벼랑 끝으로 몰리고, 가진 자들은 나누기는커녕 더 많이 가지려 한다. 여권내부의 당정 간에도 잇단 파열음이 들린다. 가히 정국은 소통부재의 난장판이고 깨지기 직전의 살얼음판이다. 힘의 논리만이 판치는 이 약육강식의 세상이 나는 두렵다. 강자가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나누기는커녕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세상, 나눔과 배려와 공존과 평화가 사무치게 그리운 세상이다. 나에게 인권이란, 전쟁 위험 없는 평화로운 나라에서 나의 노동을 정직하게 팔되 언제 해고될까 불안해하지 않는 일터에서 자신의 소박한 뜻을 펴며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다. 오염없는 환경에서 자식 낳아 기르며 오순도순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이런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외면하는 세상이 존재하는 한 민변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인권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상이 이성을 밀어내는 시대는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일찍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된 세상에 대해 부단히 간섭하고 저항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의무라면 더욱 그렇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은 법이니 이 기나긴 겨울이 춥고 혹독할수록 우리들의 봄은 더욱 찬란하리라"(고 김병곤 선생 옥중 글에서)는 말을 가슴에 되새기며 신년의 희망을 품는다.
글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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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1.01.03 10:13

글·어수갑 eohsgkdemo.or.kr



가을이 짙어가다가 찬비 후드득 내리면서 거리엔 가득 낙엽이 쏟아졌다. 시간의 흐름은 가혹하리만큼 엄정하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기억을 채 털어버리기도 전에 이제 계절은 돌이킬 수 없다는 듯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발길이 빨라지는 계절인 것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손길들 또한 덩달아 바빠지는 때이다. 조정래의 『한강』은 한 겨울의 스산한 풍경을 서술하면서 대하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밤새 무성하게 돋아난 서릿발로 세상은 싸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발가벗은 미루나무의 앙상한 잔가지들이 바람에 쓸리며 춥게 떨고, 벼 그루터기들만 남은 들녘은 폐허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어스름 저편으로 아슴푸레하게 먼 야산도 추위에 웅크린 듯 초라했고, 그 품에 보듬긴 마을은 깊은 적막에 묻혀 있었다."

이제 그런 겨울의 세계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무릇 12월은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달이다. 그리고 차가운 밤하늘의 명징한 고요함과 송년의 시끌벅적함, 한 해의 소출을 마친 풍요로움과 헐벗은 나뭇가지의 빈한함, 칼바람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어두운 거리와 따스하게 덥혀지고 불빛으로 아늑한 방안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로 겹쳐지고 융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기억의 뒷켠에 묻힐 한 해가 다 가버린다는 상념으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올 새로운 한 해에 대한 대책 없는 기대로 연말의 거리는 언제나처럼 바쁘고 을씨년스럽고 흥청거리며 떠다닌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 누구나 쓸쓸하다.

스산한 겨울 지켜주던 포장마차의 기억

청춘의 수많은 저녁 무렵을 포장마차라 불리우던 노점상에서 벗들과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 혹은 혼자서 보냈을 것이다. 카바이트 등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어둠을 겨우 밝히면, 뜨거운 멸치국물에 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소주로 몸을 덥히던,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던 시절이었으니 취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론 버티기 힘들던 동토의 겨울공화국. 그 어두웠던 시절을 품어준 노점상은 애련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러다 한국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맞은 전혀 다른 축제분위기의 노점상들은 내게 많을 걸 생각하게 했다. 성탄을 앞둔 대림절의 크리스마스 시장은 대개는 도시 중심부 시청 앞 광장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장으로 서는데, 형형색색의 불들이 밝혀진 가운데 크리스마스 트리에 필요한 각종 초나 수공예품, 치즈와 소시지 등의 농축산품 그리고 각종 스낵과 글뤼바인이라 일컫는 계피와 설탕을 넣어 끓인 따끈한 레드와인, 구운 과자와 사탕과 초콜릿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등 온갖 것들이 노점에 나왔다.

구청에 신고하고 약간의 장소임대료만 지불한 평범한 시민들이 작은 포장마차 하나를 운영하는데, 그런 점포 수백 개가 불야성을 이룬다. 노점상은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와 장려에 힘입어 주말시장의 형태나 각종 페스티발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와 광장에서 열리는데, 베를린의 가장 번화한 쿠담거리의 경우 1년에 4백만 명 정도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노점상을 애용한다고 한다. 노점상을 귀찮은 단속대상으로 여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필자가 속해 있던 한 단체에서는 매년 겨울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만두와 잡채 등을 팔아 얻은 제법 많은 수익금을 전태일기념사업회를 비롯한 국내 운동권과 인권단체 지원에 사용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시린 손을 부비며 음식을 만들거나 파는 동안 종종 내가 다녔던 서울거리의 포장마차를 떠올렸는데, 내게 술 좀 그만 마시라며 뜨거운 국물을 퍼주시던 주인아주머니와, 설거지를 도와주던 여린 중학생 딸과 반신불수가 되어 병석에 누웠다던 아저씨의 안부를 궁금해 하곤 했었다.

온 국민 사랑받는 유럽 노점상 vs. 철거와 단속대상인 한국 노점상

얼마 전 호들갑스럽게 열렸던 G20 개최 기간 동안 코엑스에 입주해 있던 상점은 거의 다 개점휴업을 했다고 한다. 강남의 골목골목에 즐비한 술집들조차 골목마다 차고 넘친 경찰에 지레 주눅들은 탓인지 거의 매상을 올리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니, 노점상은 말할 나위가 없다. 코엑스 주변은 물론 서울 곳곳의 노숙인과 노점상들이 환경미화 차원에서 국격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철거됐다. 차디찬 시멘트 건물만으로 획일화된 거리는 깨끗할지언정 사람 사는 따스함이나 여유는 보이지 않는다.

대개는 도시빈민들인 노점상들이 경찰이나 지역 깡패들의삥뜯기등의 착취와 강제철거로부터 생존권을 찾아 투쟁에 나선 역사는 제법 오래 되었다. 노점상들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비롯한 국제행사 때마다환경미화와거리질서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폭력적 강제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보다 앞선 1983년 노점상의 생계를 위협하는 강제단속은 IPU(국제의회연맹) 총회 개최당시 한 노점상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노점상 1,500여 명이 시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은 최초의 노점상들의 연대투쟁으로 조직적인 노점상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도시빈민 노점상, 생존위해 투쟁에 나서다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을 맞이하여 노점상들을 강력하게 단속했다. 노점상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86년 12월 29일 도시노점상복지회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10월 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도노련)로 개칭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노태우 정권이 다시 노점상을 탄압하자 그 간의 투쟁조직을 강화시킨 도시노점상연합회는 대중적 차원에서 노점상 탄압 반대투쟁을 준비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면 단속 예고가 내려지자 1988년6·13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이를 통해 전국조직 결성을 모색했다. 도노련은 사업방식을 대중적으로 전환하고 조직을 부산, 광주, 원주, 제주 등 전국 단위로 확대해 1988년 10월에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를 결성했다.

전국노점상연합회는 노점상의 생존권 쟁취, 도시빈민과 노점상의 발생 원인 및 잘못된 사회경제구조 개혁과 사회안전망 확보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노점 단속에 대한 대응과 노점상 간의 상호부조, 손수레 규격화, 자율질서사업, 지역공동체 사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정부는 1989년 4월 노점상 전면단속 조치를 내렸다. 이에 전노련은 단속저지투쟁과 백만 노점상 생존권 완전 쟁취 결의대회등을 개최하고 명동성당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7, 8월 노점상 투쟁의 서장을 열었다. 이후 1990년 노점상 자립법 제정 촉구 활동과 1992년 도시빈민 생존권 결의대회 개최, 3·24총선에 후보 출마,노점상 자립 합법화 공동추진위원회구성과 1993년노점상 자립 합법화 청원운동등을 꾸준히 전개해갔다. 그들은 또한 1989년 11월 11일 전국빈민연합과 1992년 7월 전국도시빈민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기념사업회 사료관에는 노점상 관련 약 350여 건, 도시빈민 관련 약 1,100여 건의 관련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비탈에 선 모든 이들을 위하여

외국 손님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자며 자기 국민들을 성난 얼굴로 다그치거나, 발전된 모습만 과시하려고 달동네 등 낙후 지역은 담장을 쳐서 가리고 도색(塗色)하는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들로 인해 정작 보호받아야 할 밑바닥 서민들은 가려지거나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그들만의 나라일 뿐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기 전에 노점상과 노숙인과 실업자와 비정규직과 독거노인 등 자본과 제도와 권력에서 소외된 모든 이웃들의 고통과 절망에 귀기울여봄은 어떨까.

로버트 투르번스타인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위대한 통찰은 일상적인 것의 숭고함(sublimity of the mundane)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고 썼다. 내년에는 거대담론이 아닌 우리네 생활 속의 소소한 일상적인 것들과 이 시대의 모든 비탈에 선 이들로부터 희망의 실타래를 감아보고 싶다.

글·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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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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