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이야기2010.05.31 11:39
 
 
희망의 여명이란 밝은 대낮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오르는 것처럼 민주화 또한 독재와 철권통치의 암울한 시기에 고된 투쟁을 통해 이루어 진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점이라 할 6월항쟁이 일어난지 어언 21년. 그런데 어째 날이 마냥 밝지만은 않은지 청계천엔 촛불 꺼질 날이 없다. 갑자기 우리 삶을 전복이라도 하려는 듯 생뚱맞은 어둠이 유령처럼 도처를 배회한다. 이상한 일이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함께하는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로소 날갯짓을 한다고 일찍이 헤겔이『법철학』 에서 설파한 바 있지만,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황혼’이 여전히 필요한 것인가. 황혼은 어둠의 전제이자 서곡이다. 그리고 어둠은 역설적으로 다시 희망을 북돋운다.
바야흐로 경제가 공공선인 시대가 도래 했다. 우리의전 존재를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economicus) 로서만 평가하겠다고 한다. 경제 논리 중심에서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일이나 민주화운동을 기록하고 당시 사료를 보존하는 그 동안의 일들은 모두 다 무가치하거나 부담스럽거나 혹은 곤혹스런 일로 폄하되고 치부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야 말로 무지와 몽매의 소치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민주화운동에 유통 기한은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새 정부는 스스로를‘산업화와 민주화를 포섭하는 선진화’를 일굴 정권으로 자기 규정한 바 있다.
 
 
기념사업회 사료관 홈페이지를 열면 뜨는 문구 중에 ‘기억의 역사를 기록의 역사로’관리하여‘민주주의의 내일을 여는 역사의 보고’가 되겠다란 말이 있다. 무릇 위대한 나라의 지혜로운 국민일수록 없애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의 기록과 잔재를 지나칠 정도로 보존한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건망증을 권장하고 미덕으로 삼자는 나라에서 기억을 보존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역사는 후대의 정권 담당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냥 뭉뚱그려 덮어버리거나 용서하고 화해한다고 발전 하는 것은 아니다. 치열하게 까발리고 끊임없이 교훈을 찾아야 하는 교사와 반면교사의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가해자(또는 국가)와 피해자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현 실태 속에서 이뤄진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 발전이다. 그때 비로소 과거를 통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당신들은 왜 선진화 시대에 자꾸만 과거 어두운 시절의 이야기를 들춰내어 상처에 소금을 뿌리냐고 애먼 소리를 할지도 모를 이들에게 최루가스에 절고 순정한 이들의 손때 묻은 사료들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한때 청춘을 바쳐 온 몸으로 일궈낸 이 정도 나마의 민주주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물들이라고. “희망은 때론 위험하지만(희망의 결과로서의) 자유는 숭엄하다.”불멸의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제어다. 민주화운동의 사료들 또한 예외 없이 자유를 위하여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보여준다. 지금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 처럼 보이더라도, 대중들의‘일시적인 복종(short - lived-compliance)’현상에 착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고 거짓이 진실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항쟁의 계절 6월을 맞아 다시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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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37
 
 
새 정부 들어서면서 새삼 언론 문제가 사회의 주요 의제로 이슈화되고 있다.‘ 조·중·동 OUT’이 전국언론노동조합을 비롯해 시민들과 누리꾼들에 의해 제기되는 반 면, KBS와 MBC에 대해서는‘국가의 불순한 언론장악음모’로부터 보호하겠다며 시민들이 촛불방패를 만들고 있다. 촛불정국에 나타난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제 4의 권부인 언론이 현대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보여준다.
정권 쪽 입장에서는 언론이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충실히 대변해주길 바랄 터이지만, 국민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은 어루만지며 불안한 미래에 희망찬 대안을 제시해 주는, 국민 편에 선 정론직필을 원한다.권위주의 정권 이래 곡필아세 하는 무리들이 판을 쳤던 이 나라에서 언론민주화운동의 길은 지난했고, 아직도 끝은 요원하다.
1987년 6월항쟁 결과물의 하나가 국민주 <한겨레신문> 의 창간이었다면, 4·19혁명으로 봇물처럼 분출했던 진보, 개혁과 평화통일을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는 <민족일보>의 탄생으로 담아졌다.
창간되자마자 가판율 1위를 점했다. 그만큼 대다수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 발생 이틀 후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를 발표함과 동시에, 진보진영을 대변해 왔던 민족일 보사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하고 그 다음날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시켰다. 창간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다.
10월 31일 최종공판에서 25살의 혁명재판관 이회창(현 자유선진당 당수)은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정희 의장이 12월 20일 형을 확인 재가한 다음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용수에 대한 전격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세상에, 그것은 한마디로 백주 대낮의 비문명한 야만이 었으니, 이후 독재정권이 전가(··家)의 보도(····)처럼20세기 대한민국을 우롱했던 야만의 서곡이기도 했다. 그런야만의 시대 앞에 비판적 지식인들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 다수는 침묵하거나 야합했고 소수는저항했으며 극소수는 제단에 자신의 피를 바쳤다.
제단의 이름은 민주주의였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켜내야마땅할 자존감이었을 것이다. 조용수도 그중의 하나였다.
민족일보 사건은 언론을 정권의 품에 장악하고 싶어 하는 독재자의 뒤틀린 꿈의 존재를 보여줬다.
기념사업회 사료관에는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관련 된 문서, 박물류, 영상물, 사진 등 귀중한 사료 6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1961년 2월 13일 창간호부터 5월 19일 강제폐간까지의 <민족일보> 영인본과 깃발, 정관, 기자 명부, <민족일보> 용 원고지와 조용수 사장의 영치물 차입원표, 재판부 제출자료, 자필 자료묶음과 심지어 그의 생전에 사주를 풀어놓은 글 등 희귀사료의 상당수는『조용수와 민족일보』라는 책을 저술한 원희복 현 경향신문 기자가 기증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일까. <민족일보>를 들추다보니 해묵은 기사 내용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창간호엔 한미 경협과 관련하여‘경제 자립성을 모독 침해 한다’는기사 와 통일사회당의‘한국민에 대한 중대모욕’이란 논평이 실려 있다. 창간사 헤드라인이‘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라니, 그렇다면 소수의 이익만 대변하는 집권층의 전횡이 전제되는 언설이 아닌가.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군사쿠데타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말이다.
신문 1면 상단의 사시(····)엔 <민족일보>가 민족의진로를 제시하고,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며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통일을 절규한다고 써있다. 사시는 신문이 지향하는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이니, 마치‘대한 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 헌법 제 1조나 마찬가지다. 너무나 당연한 가치들을 지향하기 위해 지극히 상식적 이고 원론적인 기사를 작성하고 활자화했던 그들에게 들씌워진 건 그러나‘용공’이고‘빨갱이’라는 딱지였다.
필자도 유학시절 독재에 반대하는 한 해외신문의 편집 인노릇을했던경험이있어서조금은안다. 불의한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언론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억누를수있는나름유일한방도가빨갱이타령이렀?컀?A?란것을. 우리나라 최대의 언론 탄압사건인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은 지난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로부터 명예회복을 받았고,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 했다. 47년 만의 일이다. 세기를 넘어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야만은 여전히 칼날을 거두지 않으니, 그것이 조자룡의 녹슬고 무딘 헌 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고도 우울한 일이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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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32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절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인지, 조석으로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도 마음이 핍진하고 서늘하다. 상강(霜降)도 지난 지 오래되었으니 낙과와 추수가 끝난 들판엔 지금쯤 첫서리가 내렸을 터이다. 11월은 동토를 향한 죽음에로 다가서는 계절이다. 그래서 지내온 한 해를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을 만났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그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지난 1980년대 후반 필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지부 일을 잠시 맡은 적이 있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가끔씩 만났다. 우리는 마침 30대 동갑내기였으며 당시 주변의 어른들과는 달리 말도 잘 통해서 서로를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동숭동의 학림다방에서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현실을 개탄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너절한 현실이 한심해서인지 우리는 그래도 그 시절이 한편으론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는 군사독재의 망령이 여전했으며 동구사회주의권의 연이은 붕괴로 어수선하던, 말하자면 세기말의 광풍 한가운데를 살던 시절이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온통 잿빛이었지만 언젠가는 먹장구름을 뚫고 한 올 햇살이 비칠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귀가로 피곤한 몸을 눕혀 잠을 재촉했으나 쉬이 잠들지 않는 대신, 어디선가 읽은 소설가 김영현의 자조적인 글귀가 떠올랐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이고 곧 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질풍노도의 시대를 거치고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내가, 치열한 삶의 끝을 죽음으로 마감한 자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헌사는 “역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해서 거기에 필주(筆註)를 가함으로써 있어야할 모습을 살리는 일(사마천)”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종 진상규명위원회나 내가 머물고 있는 기념사업회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수심 가운데 뒤척이며 나는 전태일 열사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떠올렸고 그 위에 오버랩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촌놈처럼 웃는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 모란공원에 사이좋게 누워있는, 죽어서 영원히 산 자가 된 아름다운 청년과 보석처럼 빛나던 그의 대학생 친구 하나를.청계천에 놓인 버들다리를 건너 평화시장으로 접어드는 들머리. 22살이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후일 『조영래 평전』을 쓴 안경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독재는 용납할망정 좌익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질서가 확고하게 정착된” 시절의 일이었다.
싸움질하는 와중에 간간히 법이라는 걸 만드는 곳이 국회이고, 그런 곳에서 태어난 근로기준법이 제 이름만큼의 역할을 하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또한 현실임을 전태일은 몰랐을까. 법대로 살고 싶은 그 청년은 그러나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로 제 각각 따로 노는 세상에서 기계처럼 노동을 팔며 살다가 예수처럼 홀연히 세상을 떴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배가 고파요.”였고 예수의 마지막 말은 “목이 마르다.”였다. 예수를 죽게 한 것이 빌라도가 아닌 탐욕과 위선과 이기로 뭉쳐진 평범한 인간들이었듯이, 전태일을 불살라 죽게 한 것 또한 박정희 만이 아닌 바로 너와 나, 우리였다. 스물 셋의 대학생 조영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했다.
11월 20일 서울법대에서 열린 전태일 추도식에서 조영래가 초안을 쓴 시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는 전태일을 죽인 5대 살인자로 “박정희 정권·기업주·어용노총·지식인·모든 사회인”등을 지목했던 것이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듯 전태일은 같은 해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의 탄생으로 부활하였고, 70년대 한국 사회운동에 정신적 견인차로, 한국 노동운동의 든든하고 자랑스런 뿌리로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일찍이 장기표는 전태일을 예수에, 조영래를 사도바울에 비유한 바 있지만, 조영래의 삶은 전태일의 죽음과 굳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에서 황홀한 불꽃을 보았고, 참혹한 사랑을 보았으며, 위대한 분노를 보았던 조영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저자 미상 상태로, 더 정확하게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의 이름으로 1983년 세상에 내어보냈으며,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명의 시대를 익명으로 버티며 숱한 이들의 가슴에 눈물로 아로새겨진 각오를 불어넣곤 했다.
『전태일 평전』으로 개명된 이 책은 저자가 죽은 후인 1991년에야 비로소 표지에 그 이름을 명토박을 수 있었고, 후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사업의 하나로 전순옥이 번역하여 『A Single Spark』으로 내놓았으며, 얼마 전엔 인도네시아에서 번역되기도 했다.
사료관은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이자 동지였던 이옥경 씨가 기증한 사료 206건을 소장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된 고발장과 변론요지서, 각종 자필메모와 <창작과 비평> 등에 게재한 글의 자필 원고, 고교 시절의 수업노트, 전태일 동지 추모비문 자필원고(사진 참조) 등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의도 패배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가 승리했던 사실로부터 배웠다는 카뮈의 술회가 새삼 가슴을 치는 시절을 살고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춤을 추는 이 수상한 시대에, 전태일을 기리는 조영래의 아랫 글을 표지석 삼아봄은 어떨지. 이글은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17주기를 맞아 모란공원의 묘소에 건립된 추모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로 새겨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음이 있어 여기 한 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 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 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 앞에 온몸으로 부딪혀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가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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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30

 
1964년 겨울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그때 터진 사자후(獅子吼) 있어 소개하면 이렇다.
“툭하면 한일회담을 조속히 해야 한다고 서두는 너,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하겠다는 너, 말마다 방정맞게 ‘국운을 걸고라도 하겠다’는 너는 정말 이 나라의 정부(政府)냐? 왜(倭)의 정부(情婦)냐.”라는 말을 했던 이는 함석헌이었다. (1964년 4월호『사상계』 중 특집 ‘한일회담의 제 문제’에서 인용)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 또는 6·3항쟁으로 불리는 1964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것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제 학생들에게 남은 것은 개인 차원의 사소한 실천뿐이었다. 그것은 또한 재래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단자(單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엔 MBC사장이었던 황용주 필화사건과 리영희 기자의 조선일보 필화사건 등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권의 횡포가 노골화된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글이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이 쓴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포장마차에서 만난 세 남자는 독특한 동아리를 이룬다. 그들은 포장마차라는 동일한 공간에 각자 술을 마시러 왔다는 공통점으로 묶이지만, 그것이 어떤 유의미한 공동체의 형성에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세 사람은 각자의 고독과 상처로 자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틀어 앉아 있을 뿐 고치 밖의 세계로 나올 염을 내지 못한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 이었다”는 지문(地文)은 그들이 함께 그러나 따로 든 여관방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모두가 몸 부리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김승옥의 단편 이야기인가?
1974년 겨울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 겨울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해 겨울 마침 동숭동 대학가에서 김승옥의 그 단편이 연극으로 올려졌다. 당시 법대에 다니던 친구가 주인공인 세 남자 중 서적외판원인가로 나왔기에 구경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해 겨울의 기억은 동아일보와 떼어 놓을 수 없다. 당시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했고, 동아일보를 보는 것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꼈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동아일보. 그 이름은 가히 어둠 속의 촛불이었다. 스스로를 태워 누리를 밝히던, 질식할 것 같던 군부독재시절의 숨통이었다.
하지만 그 신문을 중심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전개되자 12월 중순부터 정부 당국이 광고주들을 위협하여 동아일보에 싣던 광고를 중단시켰다.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그 신문사를 위한 독자들의 성금이 줄을 이었다. 성금을 내러 광화문 네거리를 건널 때 온 몸을 휘감던 그 해 겨울의 매서웠던 삭풍. 우리는 손 모아 간구했다. 제발, 제발 “씹히지 마라, 이빨 부러질 때까지”(이는 당시 격려광고에 실제 등장했던 말이다).
독재정권의 입속에 작고 단단한 돌처럼 존재하다가 정권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존재가 되길 염원했었다. 하지만 결국 경영주는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던 기자들을 축출하고 스스로 권력의 주구가 된다. 1975년 무더기로 강제해직된 동아일보 기자는 무려 113명에 이르렀다.
김승옥이 그렸던 겨울의 서울 풍경은 10년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가차 없이 무자비했고 이성은 역사에서 퇴출당한, 지독히도 음습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2008년 겨울
실개천의 물들이 모여 이윽고 장강으로 다시 대하로 흐르듯 많은 시간이 흘러 예까지 왔다. 70년대를 떠올리다 보면 가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발전만을 계속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발전만 계속한다면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가 만개한 세상에서 과거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을 까마득한 흑백사진처럼 회고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에, 유감스럽게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행스럽게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수백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자양분삼아 이나마 견고해진 것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이제 고작 반세기, 짧게 치면 20년을 갓 넘었으니, 아직 겪어야 할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은 어찌 보면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고 싶다).
얼마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기자해직사태와 관련하여 “중앙정보부 등 국가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와 동아일보에 대해 사과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무려 33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람찬 거리로 내친 집단들은 묵묵부답이다. 그들에게 무얼 바란다면 그것을 일컬어 녹목구어(綠木求魚)라 할 것인가. 그래도 역사는 굼벵이만큼이나마 진전한다고 자족해야 할까?
뭔가를 처음 봤는데 이전에도 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일컬어 데자뷔(dejavu), 또는 한자어로 기시감(旣視感)이라 한다는데, 왠지 요즘 일어난 세간의 일들이 과거 어느 시점의 반복이나 재탕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만이 갖는 착시현상일까? 2008년에 맞는 겨울은 유난히 춥게 느껴진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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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29
 
새해 첫 아침을 열며 명나라 문인 진계유가 쓴 안득장자언(安得長子言)을 생각한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평상시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뒤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정을 쏟은 뒤에야 평일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

경박했고 조급했으며 욕심이 많았기에, 침묵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텅 빈 충만’을 누리기를 새해를 맞아 소망한다. 텅 빈 충만을 바라기엔 그러나, 지난 한해가 너무나 소란했다. ‘꽉 찬 공허’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빈 말들의 잔치로 어지러웠다. 철 지난 공화국 시절에서나 종종 보아왔던 장면들이 현재에 오버랩 되어, 흡사 한편의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과거가 관에서 튀어나와 현재가 되었다. 다시는 떠올리거나 보고 싶지 않던 영화. 그것을 틀고 돌리는 자들의 구태와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모습들을 시시각각으로 보아야 했다. 흐르는 물에 눈과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판국에 어찌 새해를 맞았다고 희망을 말하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귀가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을 삼켜야 하는데, 어찌 그 귀로 들판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역사책을 고쳐서 역사를 바꿔보겠다고 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 사필(史筆)의 매서움을 모르는 자들이 설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재권력에 기생하며 영화를 누렸던 세력들이 쿠데타와 독재를 부추기고 대신 피로써 쌓아올린 4월혁명과 부마항쟁, 5·8민중항쟁, 6월항쟁을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지난하고도 찬란한 역정을 역사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집단들의 파렴치한 정치선동에 맞서, 이 땅의 모든 양심들에겐 깨어 일어나 두 눈 부릅뜨고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아야 할 무거운 시대적 책무가 어깨를 누른다.

이 밑 모를 역사 역주행의 망령이 한반도를 배회하는 2009년 새해 벽두에 박종철을 떠올린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무람하기까지 하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마치 구약의 시편에서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면, 창문도 없이 고문용 욕실만 뎅그러니 있는 509호에서 박종철은 죽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킨 것은 일차적으로는 선배의 소재였다. 우리 같이 범속한 이들에겐 그런 게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해 보이는 약속과 인간에 대한 작은 배려가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그가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유월항쟁의 싹은 텄다. 그리고 박종철 열사를 역사의 제단에 바친 우리는 유월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찬란한 꽃을 피워냈다.

박종철 사망 1주기를 맞아 박노해가 지었던 시를 꺼내 읽으며, 지금 또다시 그를 불러도 되는 것인지 나는 적잖이 망설여진다.
 

(중략)
아 종철아!
너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캐내던
네 동지들은 지금도 수배자로 쫓기고 있다
민중의 희망이 쫓기고 있다
민중의 행복이 쫓기고 있다
지금도 차가운 감방에 정치범들이 갇혀 있다
민중의 자유가 갇혀 있다
이 나라의 진실이 갇혀 있다
지금도 노동자와 민중들이 투쟁하다 탄압 당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이 깨지고 있다
우리의 소중한 꿈이 깨지고 있다 (중략) (「이제 우리 다시 너를 부른다」에서)

우리가 한 때 목숨 바쳐 이룩하고자 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었고, 그러한 세상을 향한 소박한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부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집단환상에 빠져 사랑이 깨지고 소중한 꿈이 박살나고 있으니,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물신주의야 말로 민주주의 후퇴의 가장 커다란 원인은 아닐까. 사랑을 회복하고 꿈을 되살리는 일, 이것이 경제회복이나 주가상승보다 시급한 일은 아닌지, 부자 되는 일만이 시대의 필연이라며 부자 열풍에 감염되었거나 속은 국민들이라면 새해를 맞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화두가 아닐까 싶다. 탐욕을 줄인 뒤에야 비로소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아챘던 진계유처럼, 성찰하고 다시 추스르자.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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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27
 

전국시대 위후(魏侯)가 옳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신하들이 이를 막지 않고 오히려 화답하거나 눈 감아 외면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쫓았다. 자사(子思)가 분연히 말하기를, “임금이 하는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갑니다. 임금이 그른 말을 해놓고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를 바로 잡지 못하고, 경대부들이 그른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 옳다고 하면 일반 백성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자사는 중용(中庸)의 저자이며 공자의 손자이다.

미네르바 박 아무개 씨를 ‘현대판 자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미네르바 소동으로 전국이 요동을 칠 때 언뜻 생각난 옛사람이었을 뿐이다. ‘허위사실유포죄’ 건, 곧 제정을 벼르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건 유독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법이라니, 우리의 곤혹스런 현실을 새삼 보여준다. 허위사실유포 처벌법은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유엔인권위 등에서 인권에 반한다는 권고를 해왔다고 하니, 반쯤 죽어있던 이 법을 무덤에서 꺼내 사용하는 것을 두고 ‘구시대적 발상’이니, ‘희대의 코미디’라는 말들이 나올 만도 하다. 최종판단은 법복 입은 이들의 소관이겠지만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건 추이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수들은 지난해의 사자성어로, 충고를 듣지 않아 병을 키운다는 호질기의(護疾忌醫)를 꼽은 바 있다. 그들은 올해를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택했다. 남과 화합하지만 입장을 바꿔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관용을 바탕으로 한 화합과 공존을 의미하는 말이겠다. 그 말의 어원은 논어다. 그에 따르면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소인배들은 이해가 같다면 의리를 굽혀서라도 같게 되기를 구하지만, 군자들의 사귐은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만 의리를 굽혀서까지 모든 견해에 ‘같게 되기’를 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리라. 실망과 분노의 한해를 에둘러 표현하면서 한 해를 맞을 각오를 새롭게 했다고 할까. 어쨌든 하루아침에 지금 여기 우리들의 참람해진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루아침에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을 도모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 이라는 어느 시인의 성찰은 옳다. 인간의 일을 무 자르듯 단칼에 절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끈이고, 결국은 무엇으로 관통할 것이냐는 사관의 문제로 귀착하는 것이다.

당대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역사의 서술은 달라진다. 절대 다수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아니면 극소수층을 위한 것이냐가 언제나 문제다. 1987년 일어났던 『한국민중사』 사건도 따지고 보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고픈 독재자와 그에 빌붙은 집단의 용렬한 만용에서 발단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여론을 통제하며,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가두고 말길(=언로)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게 독재 권력의 특성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국민적 정당성이 약하다보니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특성이 비판의 자유로운 소통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 당시 선전상 괴벨스, 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처럼 인류 사상의 자유로운 알갱이들을 불태움으로써 소통으로부터 불통과 단절을 시도한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날으는 교실』과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자의 『논어』가 독재의 광란에 화형을 당했다. 그런데 책을 태우는 행위보다 더한 게 출판을 금지하고 서점에 깔린 책을 회수하는 일로도 모자라 출판 관계자나 저자를 구속하는 일이다. 한국에선 그런 일이 일어났다.

1987년 2월 12일 『한국민중사』 1·2를 발간한 도서출판 <풀빛> 대표 나병식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한국민중사』의 내용 중 ‘역사의 원동력은 인간의 생산 활동이었고, 그것의 담당자는 생산대중이었다.’는 부분과 ‘현재 한국사회에서 민중이란 신식민지하에서 민족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농민·도시빈민·진보적 지식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검찰은 “저자들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관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북한의 근로인민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관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북한에 동조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기막힌 비약과 견강부회엔 경의라도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한국민중사』는 책머리에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 부단히 지금의 현실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 80년대의 현실이 긴장되고 엄숙한 것일수록 보다 정확히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 아닌 역설도 가능하다.”며 이어 서설에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사실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어제와 내일이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듯이 현재나 미래와 무관한 과거의 역사란 있을 수 없다. 현실은 지금까지 축적된 과거의 결과물이며, 역사는 바로 현실 속에 생동하는 과거의 집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이 진행되던 과정에 6월민주항쟁, 6·29 등이 발생하였다. 늘상 힘 있는 쪽의 눈치나 보던 재판부의 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987년 8월 12일 나병식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지금 자사가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 옛일을 빗대어 현재를 은유하는 일은 곤혹스럽고 또한 슬프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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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05.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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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05.3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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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05.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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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05.3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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