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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12.06 10:58

글·어수갑 eohsg@kdemo.or.kr



가을이 깊어간다. 작년 이맘 때 지리산을 종주하다 하산 길에 산끝 유평마을에서 따온 들국화를 말려 차를 만들었다. 그 고풍스럽고 은은한 차향이라니. 그런 소소한 것들 속에도 우주는 깃들어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흔들리는 들꽃과 부는 바람과 등굽은 능선 위로 뉘엿이 지는 일몰이 지친 삶의 위로가 된다고, 이 욕심 많은 세상을 살며 나는 굳게 믿는다. "오직 두 가지만이 영원하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의 멍청함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말이라면 다소 의외로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멍청함은 대부분 욕심에서 비롯한다. 욕심이 과하면 눈이 멀고 그래서 바로 앞에 전개될 자신의 운명조차 가늠하지 못하게 된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과욕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도 그와 사슬처럼 엮여진 타자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박노자 교수가 한국인들을 지배하는 실질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擬似)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라고 비판했던 적이 있는데, 러시아 혈통의 귀화 한국인인 그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 순수 한국인으로써 솔직히 부끄러움이 앞섰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 지금 한국을 떠도는 유령은 돈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돈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이상의 가치는 실종된 지 오래다. 그것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귀결이 비리백화점, 부패공화국이다. 베를린에 있는 NGO 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별 부패지수에 따르면 180개 조사국 중 대한민국의 청렴도는 고작 39위에 불과했다. OECD 국가 중 거의 끄트머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가 대체 뭘까. 너 나없이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덕목이라 여기는 풍조 때문은 아닌가.

부패공화국의 비리백화점, 태광그룹 비자금 사건

태광그룹의 비자금의혹 사건으로 연일 시끄럽다. 편법 증여의 종합판이자 비자금 공장 이라는 태광그룹은 케이블 업계에서 1위 자리를 굳히고 있는 재계 40위권의 기업인데,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촉발된 태광그룹과 그룹 회장 일가의 비리 의혹이 눈덩이처럼 부풀고 있다. 내부 고발자에 의해 거론된 비자금 액수가 수천억~1조원에 이르는 데다 정·관계 연루 의혹이 제기되면서 전형적인 대형 비리 수사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주목되는 것은 방송사업 확장을 위한 로비 대상으로 청와대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방통위 관계자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실제 2008년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티브로드가 큐릭스를 인수, 케이블TV 시장점유율 22%의 업계 1위가 된 것으로 볼 때 정치권이 태광그룹에 맞춤형 특혜를 줬을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지난해 3월 태광그룹 관계자가 방통위에서 청와대로 파견된 행정관과 방통위 간부들에게 향응과 성접대를 한 사실은 이미 노출된 바 있다.

그 많던 돈은 누가 다 먹었을까?

권위주의 정권시절 큰 손들의 뭉칫돈은 대부분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고 한다. 당시 재벌회장의 최측근 비서였던 지인으로부터 직접들은 바로는 그는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근처에 있던 내자호텔의 약속된 방으로 가서 경호실 담당자에게 각서를 쓰고 그들의 차로 바꿔 타고 궁정동 안가로 가서 대통령에게 직접 돈을 전달하곤 했다 한다. 그런 돈의 밝혀진 일부가 예컨대 전두환의 2,205억 원이다. 그는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추징금 확정 선고를 받고도 배째라로 일관하며 단돈 29만원으로 십여 년째 살고 있다. 최근 "강연료 수입이 생겼다"면서 고작 300만원을 검찰에 납부해 1,600억 원이 넘는 추징금의 시효를 연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 참 뻔뻔하시다. 국민을 우롱함이 도를 넘었다. 노태우 정권의 6공 황태자 박철언이 챙겨놓고 어떤 여교수에게 관리를 부탁하다가 떼어먹힐 뻔 했던 괴자금 178억 원의 정체도 국민들은 추측만 할뿐 시효소멸로 추궁도 못한다. 이것이 부패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여기에선 6공화국에서 일어났던 최대의 권력형 비리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노태우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수서사건

1991년 2월 3일 <세계일보>의 특종보도로 드러난 노태우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인 수서택지 분양특혜 사건은 정·경·관이 유착한 대형 스캔들이었다.

같은 해 1월 21일 서울시는 강남 수서택지개발지구 토지 35,000여 평을 주택조합에 특별공급키로 했다고 발표했으나, 이 땅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지어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해야 할 땅임이 밝혀졌다. 검찰 조사 결과 서울시가 발표한 특별 공급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수서지구택지조합 임원과 공모하여, 조합 측으로 하여금 국회에 택지 공급에 대한 청원을 내도록 한 뒤, 국회·정부 관계자·청와대에 뇌물을 제공하고, 장병조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서울시와 건설부 등 유관 기관에 압력을 가하여 택지를 공급한 것이다. 유착에 관여된 인물이 청와대·정부·국회·서울시, 여야 정치인 등 거의 모든 정계·관계에 퍼져있다는 특징이 있고, 특히 청와대와 당시 야당이었던 평민당이 서울시에 선처 요망 공문을 보낼 정도로 정파와 정당을 막론하고 정경유착이 되어 있었다.

정·관계에 걸친 이런 총체적인 부정부패에 당시의 진보정당이었던 민중당은 3월 2일 오후 3시 파고다 공원에서 당원과 학생,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서특혜 은폐조작 부패정권 규탄대회를 가진 후, 을지로입구역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민중당은 이날 대회에서 수서비리의 본질은 청와대·행정부·여·야당·독점재벌이 빚어낸 유례없는 구조적 범죄라며, 비리의 주범을 색출 처단할 때까지 지방자치제 선거 등 정부의 정치일정을 거부하자고 촉구했다. 또 계훈제, 강희남 목사 등 재야 인사 40여 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이틀째 철야농성을 벌이는 도중, 이 집회에 참석한 민중당 상임고문 백기완은 특별검사제를 도입하여 수서 사건을 전면 재수사 할 것을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대회가 끝난 후 서울시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을지로입구역까지 행진한 뒤 해산했다. 또 광주 전남 민주연합 등 광주지역 재야 단체 인사 및 시민 200여 명도 이날 오후 1시 40분쯤 광주 화니백화점 앞에 모여 수서비리 진상규명 촉구 시민대회를 갖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도 3월 9일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수서비리 규탄 국민대회에서 수서사건의 책임이 청와대에 있다며 짜맞추기 수사의혹 등을 폭로했다. 3월 16일엔 비리대책회의 주관으로 수서비리 은폐 정권 규탄 국민대회가 열려 전국적으로 국민연합, 전노협, 전대협 소속 24,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수서비리 사건은 낙동강을 페놀과 염소로 오염시킨 페놀사건 등과 함께 노태우 정권 후반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각종 비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반감을 부추겼으며, 물가 폭등과 주택문제 등 민생파탄의 지속으로 누적된 국민들의 분노는 다른 요인등과 함께 향후91년 5월투쟁의 배경이 되었다.

수서사건의 진상은 4년 후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검찰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안가에서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로부터 수서택지 분양 청탁과 함께 4차례에 걸쳐 150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참고로 후일 노태우는 2,629억 원의 추징금 선고를 받았으며 이중 2,345억여 원을 납부해 추징실적이 전두환에 비해 좋은 편이다.

노태우가 전두환보다는 덜 뻔뻔?

부패와 비리가 판칠수록 국민들은 살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난한 것에 화내기 보다는 오히려 불공정한 것에 더 화를 낸다. 이미 공자가 논어 계씨편에서 말한 바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다. 잘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지금 태광그룹의 비자금 사건뿐 아니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비자금 사건,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 비자금 사건 등 현정권 들어서도 아직 전모가 밝혀지길 기다리는 비리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우리는"임기 중 어떤 친인척·권력형 비리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시시때때로 공언하곤 했던 대통령의 말씀에 주목하며 귀추를 기다린다.

글·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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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10.12 13:01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아빠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중 하나 아닌가요? 요 세 가지 직업이 아니면 아빠가 아니잖아요. 그냥 동네 아저씨지. 아니, 표정들이 왜 그래요? 취직하려고 토익공부하려는 사람들처럼"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했던 말을 패러디한, 유명환 장관 딸의 나홀로 특채사건으로 공정한 사회 구호가 진창에 곤두박질 쳤을 때 인터넷을 떠돌던 한 누리꾼의 말이다. 웃고 넘기기에 앞서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맘 편히 살아갈 수 없는 불편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개그보다 못한 불공정사회를 향해 날리는 똥침 한방

언젠가부터 공정한 사회가 나라의 화두가 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제발 그렇게 되길 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한 사회인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엄청난 부와 권력의 세습벨트는 나라를 강남과 강남 아닌 곳으로 나눠놓았다. 강남공화국에서 강남몽을 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위장전입·부동산투기·세금탈루·병역기피·논문표절 등 온통 공정사회를 거스르는 것들인데, 그들은 대개 스스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민들을 지도편달하기 위해 총리와 장관을 위시한 권력의 노른자위를 모조리 독식하려한다.

그들만의 리그로 기회독점체제를 구축해놓고 자자손손 누리려는 이들에게 일단 제동이 걸렸다. 후반기 국정지표로공정한 사회를 내건 것은 대통령이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힘의 원천은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이다. 많은 이들이 공정사회라고 하는 슬로건이 진실로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배의 정당화를 위하고 레임덕을 최대한 방지해 보겠다는 얄팍한 정치공학적 수사는 아닌지 의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업프렌들리니 부자감세니 하면서 한편으론 친 서민을 말하는 일관성 없는 화려한 언술을 경험했기에, 만약 후자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공정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제도적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정사회 전도사 이재오

사실 공정한 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일찍부터 몽매에도 그리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른 말이 아니던가. 현 정부에도 과거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가 남다르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면, 이쯤에서 떠올려지는 한 사람이 있으니, 국민권익위원장을 거쳐 지금은공정한 사회의 전도사로 사회 각층과 소통을 도모하고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다.

1988년 어느 날 독일 베를린의 쇠네베르거우퍼에 위치한 유럽민협의 사무실로 팩스 한 장이 날아들었다. 이재오 당시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 보낸 자필이력서였다. 그것을 보내기 얼마 전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고 최종욱 형(그는 귀국하여 초창기 학단협 대표를 하며 진보학술운동을 이끌다 지병으로 사망했다)이 내게 미리 귀띔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용처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당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조국통일운동이 절정을 향해 달아오를 때였다. 아마도 당시 이재오 의장은 유럽을 경유하여 북쪽 사람들을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할 의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해외운동권이 다리를 놓아주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우리 운동은 통일운동에서 그 출로를 모색하려는 분위기를 몰고 문익환 목사, 작가 황석영의 잇단 방북이 있기 직전이었으므로 그의 구상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추진되지는 못했다. 공안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공안탄압의 광풍 속에 그도 구속되었다. 당시 그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이었으며 제1차 범민족대회 국내 준비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전민련은 어떤 단체였나.

전민련의 결성과 조국통일운동의 확대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노동자·농민 등의 기층 대중운동의 성장을 토대로 1987년 10월경부터 민족민주세력의 구심을 형성하기 위한 전국적 차원의 운동연합체 건설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8년 9월 2일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2월 22일 제14차 회의에서 전민협 결성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통해 참가 단체를 확대하고 집행부 구성을 확정시킴으로써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을 위한 창립대회를 1,1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에서 개최하였다. 노동자·농민 등 8개 부문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 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 전민련(공동의장 이부영·이창복)은 기층 민중운동의 참여가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선운동과 차별성을 가졌다.

하지만 노선과 입장의 대립과 불일치가 남아 있다는 점, 전민련에 가입된 각 부문 및 지역 단체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실하다는 점, 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전민련 활동을 이끌어 나갈 주도 세력이 부재하다는 점 등의 한계를 안고 출발하였다.

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결성식에서 대북 관계 및 5공 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진정한 민중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외세 자주화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1988년 전민련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목표로 전개되었다. ①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 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 한다 ②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 한다 ③ 미·노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전민련은 출범 이후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원흉 처단투쟁, 국가보안법 철폐, 토지공개념 도입, 민자당 해체 등의 반파쇼민주화운동과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주한미군 철수 등의 반미자주화운동 그리고 8·15 범민족대회 등의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18 영등포 을구 재선거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1990년 4월 21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13개 재야단체와 함께 국민연합을 결성하는 등 운동세력의 통일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영등포 을구 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합법정당 논쟁을 거쳐 전민련의 분열로 이어졌다. 1989년 5월 전민련 상임집행위에서의정치세력화 소위원회구성을 계기로 다시 표출된 합법정당 결성 추진 움직임은 영등포 을구 선거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합법정당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조직 내 성원들은 그 직을 사임하고 추진한다는 전민련 2차 중앙위의 결의에 따라 9월 28일 전민련 간부 중 이부영 등 합당 추진 인사들이 사직하고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었다.

이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정권의 탄압으로 조직역량이 약화되었으며,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다. 이상이 전민련의 결성과 활동 및 해체 과정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다.

그에게통섭의 지혜를 기대한다

나는 인간 이재오의 DNA 속에 전민련을 비롯한 운동에 투신했던 기나긴 시절 가졌을 평화통일에의 열정과 사회변혁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고자하는 욕구가 녹아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가 사상적 편력을 통해 얻었음직한 통섭(通涉,Consilience)의 능력으로, 이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공정사회를 구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속한 정권이 추진하고자하는 공정한 사회 담론이 정권의 비상을 꿈꾸는 날개가 될지, 침몰하는 배의 추가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그가 지난 은평구 출마 기자회견에서 "어렵지만 이번 선거에 사량침주(捨糧沈舟: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대처함)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여러분의 뜻을 겸허하게 기다리겠다"라고 했던 말을, 앞으로 남북문제 개선과 계층 간의 위화감 극복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는 데도 좌우명 삼았으면 좋겠다.

글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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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2010.09.10 10:30

글·권형택 kwon1956kdemo.or.kr


1983년 9월 30일 저녁 7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가톨릭 상지회관에 허수룩한 차림의 청년들이 긴장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이 피의 진압으로 막을 내린지 3년여 만에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봉화를 들어올린 민청련의 창립대회에 참석하고자 모여든 청년들이었다. 70년대 유신독재시대를 청춘을 바쳐 온몸으로 독재정권과 싸워온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활동가들이 민주화투쟁의 굳은 결의를 가지고 다시 모인 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정당, 사회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일체의 정부비판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고 언론에도 재갈을 물렸던 터라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준비해온 민청련이라는 민주화투쟁단체를 띄우는 이날 모임은 60명 정도가 당국의 감시를 뚫고 상지회관에 모여 창립대회를 치름으로써 일단 성공한다.

1983년 민청련의 출범
뒤늦게 모임장소를 알고 출동한 성북서 경찰들은 참석하려고 모인 사람들 상당수를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고 또 그 중 일부를 연행했지만 결국 모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경찰들은 미리 회관 내에 들어와 있는 60여명의 청년들도 전원 연행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천주교 시설 내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인지 결국 자기들이 지목하고 있는 새 집행부 명단을 제시하고 이들을 창립대회가 끝난 뒤 연행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일단 뒤로 물러난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내정된 집행부들도 일단 창립대회를 치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경찰의 요구를 수락한다. 공개단체를 표방하고 있는 터라 창립이후에 경찰이 연행한다면 연행될 뿐 막을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경찰들과 설왕설래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창립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찰들의 사전검속으로 창립대회를 준비한 많은 핵심 청년들이 참석하지 못했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 어른들도 거의 모시지 못했다. 그나마 의장으로 내정되었던 김근태 씨가 참석해 대회를 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회는 부의장으로 내정된 장영달 씨가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발기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창립선언문을 김근태 의장이 낭독함으로써 민청련은 공개대중정치투쟁단체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12시 가까이 되어 창립대회를 마치고 약속대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신임 집행부는 경찰에 전원 자진 연행되어 갔다. 필자도 다른 회원들과 함께 뒤에 남아 웃으며 의연하게 연행되어가는 이들 집행부를 전송하며 분을 삭였던 기억이 난다.
발기문과 창립선언문은 대회 준비과정에서 사전에 등사판으로 인쇄해 200여 부 정도 대회장에 들여와 배포되었고, 외신을 비롯한 언론기관에도 보도자료와 함께 돌렸다. 아마도 국내언론에는 보도되지 못하고 일부 외신에만 보도되었던 걸로 안다. 지금 사료관이 보관하고 있는 창립선언문은 대전에 있었던 가톨릭농민회 본부에서 보관하다가 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것인데 당시의 원본이 확실한 것 같다. 발기문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기증한 것으로 원본은 아니고, 그 후에 복사한 복사본으로 보인다.

민청련 창립선언문과 발기문
이 두 문건은 유신, 긴급조치 시대에 학생들이 데모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등사판으로 인쇄했다. 문건의 글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사무용 타이프라이터로 원지를 타이핑하고 이것을 등사판에 걸어 먹물로 인쇄한 것이다. 평판에 롤러를 손으로 밀어 등사하던 것보다는 조금 진화한 것으로 원통형 판에 원지를 붙이고 핸들로 돌려 등사하는 등사기를 사용했다. 당시에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에서 인쇄소의 청타 인쇄를 이용하기도 했던 때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창립대회의 보안문제가 컸던 것 같다.
이 두 문건의 초안 작성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한 소모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안다. 그 소모임은 문학평론하던 김도연(작고), 문화운동가 황선진, 그리고 필자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발기문은 김도연씨, 창립선언문은 황선진 씨가 기초하였고 소모임에서 토론하여 자구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물론 이 초안들은 신임집행부, 특히 김근태 의장의 감수를 거쳐서 수정되었는데, 발기문은 대체로 원안 그대로 되고, 창립선언문은 김근태 의장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수정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 두 문건은 길이도 짧고, 격문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민청련의 이념이나 운동론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민청련의 이념과 운동론은 다음 해 1984년 3월에 발행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서 비교적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문건에서도 민청련운동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개략적인 틀을 엿볼 수 있다. 이 문건에서 민청련운동은 멀리는 동학혁명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가까이는 4·19혁명의 반봉건, 반식민, 반독재 민족민주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히면서, 동시에 분단을 강제하는 외세와 군사독재권력에 대항하는 통일지향운동이고, 핵전쟁 위기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집단의 반민중성에 대항하여 가난과 소외를 극복하고자하는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운동임도 강조한다.
또한 이 시기에 민청련운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80년 5월 광주시민대학살에 있음을 천명하여 군사정권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겨눈다.

92년 전국청년단체협의회가 창립되면서 활동 마감
당시에 사진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창립대회의 상황이나 참석인사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사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창립대회 이후에 단체 자체가 존립할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서 정보기관의 소중한(?) 정보로 바쳐질 수도 있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민청련은 집행부는 공개되었지만 회원조직이나 그밖의 참모조직은 비공개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내부행사에서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민청련은 창립 이후 87년 6월항쟁까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줄기차게 투쟁하여 많은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6월항쟁 이후에 청년대중조직으로 전환하여 92년까지 활동하다가 대중적 청년운동 전국조직인 전국청년단체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자진 해체하여 활동을 마감한다.
창립멤버 중 김근태 의장, 장영달 부의장, 이해찬 상임위 부위원장, 박계동 홍보국장 등 여러 사람들이 제도정치권에 진출했고, 그 밖의 많은 회원들이 민청련 창립의 정신을 간직하면서 사회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청련 조직과정에 참여했고 일선에서 투쟁하다가 돌아간 고 채광석, 고 김도연, 고 김병곤, 고 홍성엽, 고 이범영, 고 안희대, 고 박기상, 고 김기설 등은 민주화운동사에 길이 기록되어야할 인물들이다.

글·권형택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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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8.11 11:33

글·어수갑 eohsgkdemo.or.kr


대통령을 비방하는 동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퍼옮겼다는 이유로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온갖 불이익에 처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자 관련자 몇몇이 옷을 벗었고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직복무관리관실’로 서둘러 개명을 했지만, 국민들의 의혹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의 본질이 ‘정권실세’에 의한 ‘공권력의 사병화’에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세의 하나가 ‘영포회’란다. 영포회? 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는 그것을 처음 듣는 순간 무슨 생선회 이름인줄 알았다.

민간인 사찰로 국정 농단하는 세력 있다면 ‘화학적 거세’ 해야

특정지역을 매개로 권력 실세와의 직거래가 이뤄지는 구조에서 감시기관인 지원관실은 공식적 업무범위나 권한에 얽매이지 않는 무소불위의 ‘사찰권’을 휘두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해관계로 뭉쳐진 그들의 추잡한 행태는 한 여당의원의 고백으로도 100건이 넘는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비정(秕政)을 일삼는 비선(秘線) 실세들의 왜곡된 ‘순혈주의’ 앞에서 그들과 애초 혈통이 다른 대다수 국민들이 느끼는 심정은 분노에 앞서 이대로 놔두다간 나라가 절단 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일 것이다. 국정을 농단하며 호가호위하는 세력에 대해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화학적 거세’라도 해서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국민들의 신뢰는 멀어지고 정권의 레임덕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끝없이 불거지는 민간인 사찰의혹

무릇 사찰이란 대중에 대한 노이로제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우리의 곡절 많은 현대사에도 사찰의 상처는 곳곳에 있다.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가증할 범죄로 기록된 ‘보도연맹사건’으로부터 방첩대·중정·보안사·안기부·기무사 등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사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통성 없는 권위주의 정권 때나 있을 법한 민간인에 대한 사찰 의혹은 현정권 들어서도 끊임없이 불거졌다. 국정원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사찰 논란, 기무사의 민주노동당 당직자 행적 조사, 이른바 ‘좌파’ 교육감 후보 지원 상황에 대한 경찰의 조사, 기무사의 쌍용자동차 사찰, 한국노총 공공연맹위원장 미행, 방송가의 ‘블랙리스트’ 논란, 그리고 최근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의한 민간인 사찰에 이르기까지. 국가기관들이 사찰경쟁이라도 벌인단 말인가? 열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숨찰 정도다.

윤석양 이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기록 공개 양심선언

과거 대표적인 민간인 사찰사건 하나를 살펴보자. 군 복무 중 보안사에 파견돼 이른바 ‘수사협조’를 해 오다 양심의 가책으로 1990년 9월 23일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10월 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국군 보안사가 군 관계 정보수집 및 군 수사업무 외에 김영삼 민자당 최고대표위원,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이기택 민주당 총재 등 여야 현직 의원 등과 종교언론·문화·예술·노동·학원가 등 사회 전반에 걸쳐 1,300여 명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정치사찰 및 동향파악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윤 이병은 이에 대한 증거물로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지니고 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0여 장,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파악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켓 30여 장 등을 공개했다. 사찰 대상자의 개인신상카드에는 가족사항, 경력, 교우 및 배후 인물, 개인 특성 등 모두 9개 항목이 기록되어 있었고, 집의 담장 높이,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 등까지도 세밀히 파악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요 동향파악 대상자에게는 담당관 1명이 지정돼 매달 말 한 차례씩 대상자의 발언 내용, 접촉 인물 등을 담은 ‘문제인물동향관찰보고서’를 작성토록 했다고 말했다.
외대 러시아과에 재학 중이던 윤석양은 학생운동을 하다 4학년 때 제적되었으며, 1990년 5월 입대 후 운동권 전력으로 말미암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어 운동권 수사에 협조하던 중 민간인 사찰기록을 갖고 탈영한 것이다.

“민간인 사찰 책임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그동안 물증 없이 추측만 했던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현실로 드러나자 이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10월 7일 오전, 보안사의 집중 사찰을 받아 온 야당과 재야단체회원 등 70여 명은 을지로 2가 향린교회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성명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불법사찰에 관련돼 있는지 여부가 밝혀져야 한다며 관련이 있다면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월 8일 전대협은 “이번 사찰은 현 정권이 내각제 개헌을 하기 위해 벌인 사전정지작업”이라며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주장했다.v 10월 13일 오후 서울 동작구 보라매 공원에서도 ‘보안사 불법사찰 규탄과 군정 종식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장 연단 좌우에는 보안사 사찰 대상으로 알려진 정계, 재야, 학계 등 인사 100여 명이 흰 종이에 푸른색 매직펜으로 쓴 자신들의 사찰고유번호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참석했다.

대학생과 국민연합, 민중당 등 재야단체 회원 및 시민 등 2만여 명은 보라매 공원 정문을 나와서 대방전철역까지 4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1시간 동안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해체 보안사’, ‘타도 노태우’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방동 로타리에 도착하여 저지하는 경찰과 맞섰다. 40개 중대 6,000여 명의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등 163명을 연행했다.
정국이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이자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기무사로 개편됐다. 한편 윤석양은 1992년 9월 체포돼 군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94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상이 20년 전에 일어났던 보안사의 민간인사찰에 대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사건 전모이다.
세상의 흐름이 과거로 역류한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이던가? 하지만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신영복 선생의 지적처럼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환하는 것이다. 현재의 실천 속에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된다.

사유화된 권력은 폭력이자 인권에 대한 저주

“사유화된 권력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조폭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국격, 국격 하는데 사찰이야말로 국격 떨어지는 가장 저질스런 폭력이고 인권에 대한 저주”라는 작가 서해성의 일갈을 곰씹을 필요가 있다. 아주 조그만 공공기관의 말석에 있는 필자같은 범부도 글을 쓰면서 마음 속의 보안장치가 나도 모르게 작동하여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심리상태를 종종 경험한다. 내가 비정상인가, 아니면 시대가 수상한 것인가. 불특정다수가 거대한 신경증에라도 걸리는 게 오히려 당연한 시대, 알아서 기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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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민주주의 동영상2010.07.19 14:35
이 영상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것으로 민주화운동 당시에 관한 상황과 기억들을 관련인 및 시민들의 인터뷰로 엮어놓은 영상입니다.



본 영상물은 1분 이후의 시점부터 시작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시대와의 인터뷰 from KDF Archives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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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민주주의 동영상2010.07.19 14:3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제작한 한국민주화운동사 영상입니다. 한국민주화운동에 관한 역사를 짧게 정리했습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from KDF Archives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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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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