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이야기2011.02.11 09:03

글·어수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eohsgkdemo.or.kr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창궐, 거기에 신종플루까지. 올 겨울은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하필 이 시대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산채로 싹쓸이 살처분 당한 짐승들에겐 같은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정말 면목이 없다. 소 돼지 닭 오리를 사육하는 축산농가 농민들의 타들어가는 마음 또한 위로할 길이 없다. 일차적으로는 그동안의 반생명적 축산정책과 초동대처에 미흡했던 관계당국에 책임이 크지만, 넓게 보면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과도한 육식을 즐겼던 우리 모두 에게도 책임이 있다. 내남없이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그저 생일이나 명절날 올라 온 멀건 고깃국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실은 수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처럼 흥청망청 언제든지 상품으로 육류를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작 최근의 일이다.


‘죽어가는 소, 피울음 농민

주지하는 것처럼 좁아터진 사육장에서 90% 이상의 수입사료로 속성 사육되는 ‘고기’는 이미 우리와 함께했던 식구와도 같은 반려동물이 아니다. 소비자의 욕 망을 위해 소비되는 상품일 뿐이다. 풀이나 볏짚 같은 여물을 먹고 논밭을 갈며 살던 소에게 속성사육을 위해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와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로 뒤범벅된 것도 모자라 사료 안에 심지어는 같은 소의 내장 등 부산물이 첨부되기 도 했다. 애초에 좁은 국토를 감안하여 합리적인 축산정책을 썼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친환경적이고 친생명적으로 사육했더라면 오 늘의 문제는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피해가 최소한에 그쳤을 것이다. 좁은 땅에 소만 340만 마리나 되고 돼지는 1,000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숫자 다. 총인구수 14명당 한 마리가 사육되는 실정이다. 물론 생태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마구잡이 성장제일주의 정책의 직접적 피 해자는 축산농민들이지만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공장식 밀집사육의 희생물은 축산농민에 앞서 무참히 살육당한 짐승들이다. 종국에는 인간의 먹잇감이 될 하 찮은 짐승이라지만 생명 있는 존재에게 지켜야할 것도 있지 않을까. 이번 사태는 맛있는 고기를 더 많이 먹으려는 인간의 끝없는 식탐과 수익만 최대한 창출하려 는 업자들의 물욕과 이를 부추기는 산업논리 등 사슬처럼 엮어진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번 구제역 파동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살육의 공범자다. 거기에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도 심 각한 결함이 더해졌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 이 글을 쓰는 현재 구제역으로 200만 마리, 조류인플루엔자로 350만 마리의 생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탐욕에 눈먼 인간들에게 던지는 뭇 생명들의 경고

행동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육식의 종말』이란 책 에서 반생명적 식습관에 물든 인간들을 위해 대량으로 소를 길러 육식을 즐 기는 동안 생태계가 파괴되고 굶어 죽어가야 하는 제3세계 수많은 사람들에 게 시선을 돌리라고 충고하면서 인간의 잔인함과 탐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비판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소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우고 있는 한편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 조에 허덕이고 있다. 사육 가축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무자비한 환경파괴 는 지구온난화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과도한 육식을 취하는 부자나라의 절반이 비만인 반면, 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 기막히게 불공평하고 부정의 한 현실이다. 우리 모두 이번 참사를 더 잘 먹고 더 많이 벌고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오로지 성장만이 최고의 덕목이 된 인간세상에 지구촌의 뭇 생명들이 던지는 경고로 삼아봄은 어떨까.


“양키소 몰아내고 한국소 살아보자”외친‘소몰이투쟁’

농민들이 소 때문에 고통받았던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1978년 박정희 정 권의 수입자유화 조처에 의해 시작된 농축산물의 무분별한 과다도입으로 인 한 소값 폭락 등으로 농가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빠지게 되고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떨어지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985년 소값 피해보상과 미국의 농축산물 수입개방 압력 철회를 주장하는‘소몰이투쟁’등의 생존권투쟁은 6월항쟁을 거치고 1989년 2월의 여의도농민투쟁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 글에서는 여의도농민투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농민들, FTA‘전신’인 UR 반대로 자주화 눈떠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부터 시작된 GATT-UR(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진행되면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은 더욱 거 세졌다. WTO-FTA(세계무역기구-자유무역협정) 체제 확립을 시도하려는 미국 등 의 선진국 그룹과의 싸움의 초기형태 정도라고 할까. 노태우 정부는 1987년 양담 배 수입을 허락하는 동시에 잎담배의 작목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과도 하게 고추를 심게 했다. 그 결과 1988년 고추생산량이 전년대비 52%가 증가하고 근당 2,500원하던 고추가격이 1,000원 이하로 폭락했다. 이에 농민들은 1987년의 고추값 폭락과 수세제도의 불합리성 및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하 여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서 수세투쟁과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1985년 전남 무안군에서 시작된 부당 수세거부투쟁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전 국적으로 확대되어 1988년 11월 1일‘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등을 꾸리고 수 세폐지와 고추전량 수매를 위한 투쟁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나 전개하였 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수매가에 대한 국회동 의제가 실시되었고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추값은 나날이 폭락하였다. 정부의 저곡 가정책에 분노한 농민들은 국회 개원 시기에 맞춰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의도광장에서 농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3만 농민 여의도 모여 수세폐지·고추전량수매 요구

1989년 2월 13일 전국 99개 군 농민 3만여 명은 여의도광장에 모여‘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와 ‘고추생산지역대책위원회’가 함께 한 것이다. 공동집회를 끝마치고 4당 대표와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 며 저지하자 분노한 농민들은 만장이나 깃발을 달기 위해 가져 온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면서, KBS·정부 업무수행 차량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농민운동 지도자와 전민련 의장 및 전대협 의장 등 민족민주운동 세력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에서 총 458명이 연행 되어 117명 입건, 6명 구속, 9명이 불구속되었다. 농민들은 2월 25일‘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26개 군에 서 동시에 개최하면서 투쟁하였다. 그러나 편향된 언론들의 농민들에 대한 폭력성 부각과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은 농민운동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가톨릭농민회 등은 배후세력으로 지목되 어 정부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일반국민들이 공감하게 되었으며 수세인하의 성과도 이루었다. 농민들의 요 구는 수세 폐지, 고추 전량수매, 농축산물 수입중지, 의료보험제도 통합일원 화 등 의료보장제도 전면실시 등이었다.



투쟁의지 모아‘전국농민운동연합’결성

흔히‘죽창시위’로 불리는 여의도 농민 시위는 1960·1970년대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1980년대 들어서는 농축산물 수입개방 조치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농민들은 자주적 투쟁을 통해 농민의 생존권 확보 및 정당한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해 스스로 나섰으 며 이를 통해 미국과 결탁한 노태우 정권의 사대주의적이고 반농민적인 행태 를 전 국민들에게 폭로했다. 또 이 투쟁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 회 등 기존의 전국적 농민운동조직과 1980년대 하반기부터 광범위하게 결성 되기 시작한 자주적 농민 대중조직의 일부가 연합하여 1989년 3월 2일 전국농 민운동연합(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발족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 아름답다. 존귀하다. 생명있는 것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우리 스스로의 존재도 빛난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간 짐승들의 명복을 빌며, 워낭 흔들며 평화로이 풀을 뜯는 누렁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농부들의 환한 얼굴을 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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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10.12 13:01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아빠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중 하나 아닌가요? 요 세 가지 직업이 아니면 아빠가 아니잖아요. 그냥 동네 아저씨지. 아니, 표정들이 왜 그래요? 취직하려고 토익공부하려는 사람들처럼"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했던 말을 패러디한, 유명환 장관 딸의 나홀로 특채사건으로 공정한 사회 구호가 진창에 곤두박질 쳤을 때 인터넷을 떠돌던 한 누리꾼의 말이다. 웃고 넘기기에 앞서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맘 편히 살아갈 수 없는 불편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개그보다 못한 불공정사회를 향해 날리는 똥침 한방

언젠가부터 공정한 사회가 나라의 화두가 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제발 그렇게 되길 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한 사회인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엄청난 부와 권력의 세습벨트는 나라를 강남과 강남 아닌 곳으로 나눠놓았다. 강남공화국에서 강남몽을 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위장전입·부동산투기·세금탈루·병역기피·논문표절 등 온통 공정사회를 거스르는 것들인데, 그들은 대개 스스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민들을 지도편달하기 위해 총리와 장관을 위시한 권력의 노른자위를 모조리 독식하려한다.

그들만의 리그로 기회독점체제를 구축해놓고 자자손손 누리려는 이들에게 일단 제동이 걸렸다. 후반기 국정지표로공정한 사회를 내건 것은 대통령이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힘의 원천은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이다. 많은 이들이 공정사회라고 하는 슬로건이 진실로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배의 정당화를 위하고 레임덕을 최대한 방지해 보겠다는 얄팍한 정치공학적 수사는 아닌지 의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업프렌들리니 부자감세니 하면서 한편으론 친 서민을 말하는 일관성 없는 화려한 언술을 경험했기에, 만약 후자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공정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제도적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정사회 전도사 이재오

사실 공정한 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일찍부터 몽매에도 그리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른 말이 아니던가. 현 정부에도 과거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가 남다르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면, 이쯤에서 떠올려지는 한 사람이 있으니, 국민권익위원장을 거쳐 지금은공정한 사회의 전도사로 사회 각층과 소통을 도모하고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다.

1988년 어느 날 독일 베를린의 쇠네베르거우퍼에 위치한 유럽민협의 사무실로 팩스 한 장이 날아들었다. 이재오 당시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 보낸 자필이력서였다. 그것을 보내기 얼마 전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고 최종욱 형(그는 귀국하여 초창기 학단협 대표를 하며 진보학술운동을 이끌다 지병으로 사망했다)이 내게 미리 귀띔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용처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당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조국통일운동이 절정을 향해 달아오를 때였다. 아마도 당시 이재오 의장은 유럽을 경유하여 북쪽 사람들을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할 의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해외운동권이 다리를 놓아주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우리 운동은 통일운동에서 그 출로를 모색하려는 분위기를 몰고 문익환 목사, 작가 황석영의 잇단 방북이 있기 직전이었으므로 그의 구상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추진되지는 못했다. 공안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공안탄압의 광풍 속에 그도 구속되었다. 당시 그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이었으며 제1차 범민족대회 국내 준비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전민련은 어떤 단체였나.

전민련의 결성과 조국통일운동의 확대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노동자·농민 등의 기층 대중운동의 성장을 토대로 1987년 10월경부터 민족민주세력의 구심을 형성하기 위한 전국적 차원의 운동연합체 건설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8년 9월 2일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2월 22일 제14차 회의에서 전민협 결성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통해 참가 단체를 확대하고 집행부 구성을 확정시킴으로써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을 위한 창립대회를 1,1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에서 개최하였다. 노동자·농민 등 8개 부문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 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 전민련(공동의장 이부영·이창복)은 기층 민중운동의 참여가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선운동과 차별성을 가졌다.

하지만 노선과 입장의 대립과 불일치가 남아 있다는 점, 전민련에 가입된 각 부문 및 지역 단체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실하다는 점, 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전민련 활동을 이끌어 나갈 주도 세력이 부재하다는 점 등의 한계를 안고 출발하였다.

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결성식에서 대북 관계 및 5공 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진정한 민중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외세 자주화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1988년 전민련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목표로 전개되었다. ①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 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 한다 ②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 한다 ③ 미·노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전민련은 출범 이후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원흉 처단투쟁, 국가보안법 철폐, 토지공개념 도입, 민자당 해체 등의 반파쇼민주화운동과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주한미군 철수 등의 반미자주화운동 그리고 8·15 범민족대회 등의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18 영등포 을구 재선거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1990년 4월 21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13개 재야단체와 함께 국민연합을 결성하는 등 운동세력의 통일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영등포 을구 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합법정당 논쟁을 거쳐 전민련의 분열로 이어졌다. 1989년 5월 전민련 상임집행위에서의정치세력화 소위원회구성을 계기로 다시 표출된 합법정당 결성 추진 움직임은 영등포 을구 선거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합법정당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조직 내 성원들은 그 직을 사임하고 추진한다는 전민련 2차 중앙위의 결의에 따라 9월 28일 전민련 간부 중 이부영 등 합당 추진 인사들이 사직하고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었다.

이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정권의 탄압으로 조직역량이 약화되었으며,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다. 이상이 전민련의 결성과 활동 및 해체 과정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다.

그에게통섭의 지혜를 기대한다

나는 인간 이재오의 DNA 속에 전민련을 비롯한 운동에 투신했던 기나긴 시절 가졌을 평화통일에의 열정과 사회변혁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고자하는 욕구가 녹아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가 사상적 편력을 통해 얻었음직한 통섭(通涉,Consilience)의 능력으로, 이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공정사회를 구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속한 정권이 추진하고자하는 공정한 사회 담론이 정권의 비상을 꿈꾸는 날개가 될지, 침몰하는 배의 추가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그가 지난 은평구 출마 기자회견에서 "어렵지만 이번 선거에 사량침주(捨糧沈舟: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대처함)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여러분의 뜻을 겸허하게 기다리겠다"라고 했던 말을, 앞으로 남북문제 개선과 계층 간의 위화감 극복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는 데도 좌우명 삼았으면 좋겠다.

글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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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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