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이야기2011.02.09 10:19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어떤 이는 말했다. 이 풍진 세상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희망이라고. 자조적인 표현이지만, 그러므로 많은 것에 절망한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희망만이 남았다. 신묘년 새해, 희망세상이 시작되었다.
해마다 1월이면 떠오르는 이 있으니, 1987년 새해 벽두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이다. 그의 죽음은 KNCC 인권위, 민가협, 변협 등으로 구성된 고 박종철 고문치사 공동대책위원회를 낳았고, 이는 다시 고문추방 범국민기구로 확장되었다. 고문정권에 대해 자식을 가진 부모들을 비롯한 전국민의 공분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정권타도를 향한 응집된 결집력은 마침내 6월항쟁을 일궈냈다.
그리하여 6월항쟁 이후 인권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인권특별위원회를 국회에 설치하겠다는 다짐을 받게 했는데, 이는 공안정국 도래로 현실화되진 못했지만 그 후 20여 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적 차원의 인권전담 기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2002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박종철에게 빚을 진 셈이다. 박종철이란 무구한 청년의 피로 표상되는, 민주화를 향한 숱한 죽음의 제단 위에 설립된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인 것이다.

1월이면 되살아나는 박종철의 기억

국가인권위원회가 제 이름에 걸맞게 작동하던 시절, 짧은 시간에 유래 없이 이룩한 민주주의에 세계는 경의를 표했다. 오랜 기간 인권탄압국이었던 내 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유랑하던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인권은 더 이상 정권과의 대립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랬다. 그런데, 이루어내기는 참으로 어려웠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배워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며 단 한순간도 가꾸기를 소홀히 하는 순간 메말라버리는 존재임을.
포크레인으로 마구 파헤쳐져 형체가 사라진 강가의 모래톱처럼, 다시 원상으로 회복하기엔 그 상처가 깊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어쩌랴,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하라고 한다.

인권 수호의 선봉에 선 민변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양심수들에 대한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한 인권변호사들의 활동이 펼쳐졌다.
이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사건을 공동 변론한 것을 계기로 1986년 5월 19일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1970년대에 정치적 사건을 변론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던 중견그룹과, 1980년대에 노동사건 등으로 변론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던 젊은 변호인들의 결합이었다.
조준희, 강신옥, 이돈명,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박원순, 조영래 변호사 등이 주축이 되어 1987년 6월민주항쟁 무렵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맡아 인권보호의 선봉에 선다. 권인숙 씨에 대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씨 고문 사건의 폭로와 변론을 비롯하여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망원동 수재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말>지 보도지침사건을 담당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1985년부터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에 인권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인권보고서를 발간하여 주요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세상에 알렸다. 인권보고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포괄하는 인권백서였다. 이들은 1987년 6월항쟁을 이끄는 구심체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주세력의 많은 희생과 오랜 노력의 결과, 1988년 제6공화국에 들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게 됨에 따라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변론 활동에서 더 나아가 전반적인 법 제도와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조사·연구와 대안 마련이 요청되었다. 또 한편으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신진 변호사 층이 대거 배출되었다. 억압의 소산인 인권사건에 대한 공동대응 특히 조직적 변론의 필요성 등 시대적 요구와 조건에 부응하여, 정법회가 발전적으로 해소되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신진 변호사 층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던 청년변호사회와 함께 1988년 5월 28일 드디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창립되었다.

이돈명·한승헌·홍성우·조영래·박원순 등이 주축

민변 창립이 가지는 의의는 첫째, 변호사 업무의 개별·분산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단점을 극복하여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에 대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토록 하였다는 것과 둘째, 전체 민주화운동세력 안에서 법률가단체로서 전문성과 합리성을 살려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위한 비판과 건설적인 대안 제시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89년에 악법개폐의견서를 발간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개폐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과 임수경 전대협 대표 방북사건을 변론하고, 5·18 진상 규명·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거리시위(1995년 10월 16일), 안기부법·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항의농성(1996년 12월 30일) 같은 집단행사에도 참여 했다.
그 후 2002년 11월에는 『한총련을 위한 변론』을 발간하였으며, 특히, 세계인권선언 선포일을 기념하여, 우리 사회의 인권상황을 총점검 하는 한국 인권보고대회 및 토론회를 개최해왔다. 또 격월간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을 1998년 1월부터 발간하였다. 이 책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발간된 반년간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과 1996년 8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발간된 월간지 [이달의 민변]의 맥을 잇는 것으로서, 민변 회원들의 활동 결과와 더불어 외부 인권단체의 자료, 법학자·인권운동가의 글을 함께 게재함으로써 법률·인권지의 역할을 했다.
사업회 소장사료 중 [민변 6개월 회고]에 의하면 대내적으로는 리영희, 윤소영 교수 등을 초빙해서 강연을 들으며 매주 금요일 노동운동, 통일론 등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를 10여 회 개최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대외적으로는 박종철, 권인숙 손해배상 사건들과 국보법 위반 등을 변론하였고 양심수 공청회를 열기도 하면서 각종 성명발표, 조사활동,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민변이 발행한 월간지 [이달의 민변]은 민변의 당시 활동과 관심사를 소상하게 보여준다. [민변백서-민변 10년의 발자취]도 민변 10년의 활동을 담고 있는 사료다. 대한변협에서 인권위원으로 참여했던 민변 주체들이 작성한 [인권보고서]도 주요사료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세상, 찬란한 봄 기다릴 터

지금 이 나라는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태다. 원활히 움직여야할 기와 혈이 여기 저기 막혀 체하고 울혈이 들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불통을 넘어 전쟁 직전의 파탄에로 이르렀다. 못가진 자들은 아무런 출로도 마련되지 못한 채 벼랑 끝으로 몰리고, 가진 자들은 나누기는커녕 더 많이 가지려 한다. 여권내부의 당정 간에도 잇단 파열음이 들린다. 가히 정국은 소통부재의 난장판이고 깨지기 직전의 살얼음판이다. 힘의 논리만이 판치는 이 약육강식의 세상이 나는 두렵다. 강자가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나누기는커녕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세상, 나눔과 배려와 공존과 평화가 사무치게 그리운 세상이다. 나에게 인권이란, 전쟁 위험 없는 평화로운 나라에서 나의 노동을 정직하게 팔되 언제 해고될까 불안해하지 않는 일터에서 자신의 소박한 뜻을 펴며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다. 오염없는 환경에서 자식 낳아 기르며 오순도순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이런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외면하는 세상이 존재하는 한 민변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인권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상이 이성을 밀어내는 시대는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일찍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된 세상에 대해 부단히 간섭하고 저항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의무라면 더욱 그렇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은 법이니 이 기나긴 겨울이 춥고 혹독할수록 우리들의 봄은 더욱 찬란하리라"(고 김병곤 선생 옥중 글에서)는 말을 가슴에 되새기며 신년의 희망을 품는다.
글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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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32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절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인지, 조석으로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도 마음이 핍진하고 서늘하다. 상강(霜降)도 지난 지 오래되었으니 낙과와 추수가 끝난 들판엔 지금쯤 첫서리가 내렸을 터이다. 11월은 동토를 향한 죽음에로 다가서는 계절이다. 그래서 지내온 한 해를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을 만났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그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지난 1980년대 후반 필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지부 일을 잠시 맡은 적이 있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가끔씩 만났다. 우리는 마침 30대 동갑내기였으며 당시 주변의 어른들과는 달리 말도 잘 통해서 서로를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동숭동의 학림다방에서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현실을 개탄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너절한 현실이 한심해서인지 우리는 그래도 그 시절이 한편으론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는 군사독재의 망령이 여전했으며 동구사회주의권의 연이은 붕괴로 어수선하던, 말하자면 세기말의 광풍 한가운데를 살던 시절이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온통 잿빛이었지만 언젠가는 먹장구름을 뚫고 한 올 햇살이 비칠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귀가로 피곤한 몸을 눕혀 잠을 재촉했으나 쉬이 잠들지 않는 대신, 어디선가 읽은 소설가 김영현의 자조적인 글귀가 떠올랐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이고 곧 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질풍노도의 시대를 거치고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내가, 치열한 삶의 끝을 죽음으로 마감한 자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헌사는 “역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해서 거기에 필주(筆註)를 가함으로써 있어야할 모습을 살리는 일(사마천)”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종 진상규명위원회나 내가 머물고 있는 기념사업회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수심 가운데 뒤척이며 나는 전태일 열사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떠올렸고 그 위에 오버랩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촌놈처럼 웃는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 모란공원에 사이좋게 누워있는, 죽어서 영원히 산 자가 된 아름다운 청년과 보석처럼 빛나던 그의 대학생 친구 하나를.청계천에 놓인 버들다리를 건너 평화시장으로 접어드는 들머리. 22살이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후일 『조영래 평전』을 쓴 안경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독재는 용납할망정 좌익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질서가 확고하게 정착된” 시절의 일이었다.
싸움질하는 와중에 간간히 법이라는 걸 만드는 곳이 국회이고, 그런 곳에서 태어난 근로기준법이 제 이름만큼의 역할을 하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또한 현실임을 전태일은 몰랐을까. 법대로 살고 싶은 그 청년은 그러나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로 제 각각 따로 노는 세상에서 기계처럼 노동을 팔며 살다가 예수처럼 홀연히 세상을 떴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배가 고파요.”였고 예수의 마지막 말은 “목이 마르다.”였다. 예수를 죽게 한 것이 빌라도가 아닌 탐욕과 위선과 이기로 뭉쳐진 평범한 인간들이었듯이, 전태일을 불살라 죽게 한 것 또한 박정희 만이 아닌 바로 너와 나, 우리였다. 스물 셋의 대학생 조영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했다.
11월 20일 서울법대에서 열린 전태일 추도식에서 조영래가 초안을 쓴 시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는 전태일을 죽인 5대 살인자로 “박정희 정권·기업주·어용노총·지식인·모든 사회인”등을 지목했던 것이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듯 전태일은 같은 해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의 탄생으로 부활하였고, 70년대 한국 사회운동에 정신적 견인차로, 한국 노동운동의 든든하고 자랑스런 뿌리로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일찍이 장기표는 전태일을 예수에, 조영래를 사도바울에 비유한 바 있지만, 조영래의 삶은 전태일의 죽음과 굳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에서 황홀한 불꽃을 보았고, 참혹한 사랑을 보았으며, 위대한 분노를 보았던 조영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저자 미상 상태로, 더 정확하게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의 이름으로 1983년 세상에 내어보냈으며,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명의 시대를 익명으로 버티며 숱한 이들의 가슴에 눈물로 아로새겨진 각오를 불어넣곤 했다.
『전태일 평전』으로 개명된 이 책은 저자가 죽은 후인 1991년에야 비로소 표지에 그 이름을 명토박을 수 있었고, 후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사업의 하나로 전순옥이 번역하여 『A Single Spark』으로 내놓았으며, 얼마 전엔 인도네시아에서 번역되기도 했다.
사료관은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이자 동지였던 이옥경 씨가 기증한 사료 206건을 소장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된 고발장과 변론요지서, 각종 자필메모와 <창작과 비평> 등에 게재한 글의 자필 원고, 고교 시절의 수업노트, 전태일 동지 추모비문 자필원고(사진 참조) 등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의도 패배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가 승리했던 사실로부터 배웠다는 카뮈의 술회가 새삼 가슴을 치는 시절을 살고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춤을 추는 이 수상한 시대에, 전태일을 기리는 조영래의 아랫 글을 표지석 삼아봄은 어떨지. 이글은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17주기를 맞아 모란공원의 묘소에 건립된 추모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로 새겨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음이 있어 여기 한 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 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 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 앞에 온몸으로 부딪혀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가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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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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