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동영상2010.07.19 14:3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역사 다시보기 시리즈
mbc 프로덕션 2003년 제작

5.18 민중항쟁 from KDF Archives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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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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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곽
사료이야기2010.05.31 10:34

한봉이 형

 

글∙어수갑 eohsgkdemo.or.kr

 

1948년 강진 출생.
1974년 전남대 농대 4년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 제적.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1979년 <현대문화연구소> 설립, 또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1980년 5월 광주항쟁으로 현상수배.
1981년 4월 미국으로 밀항탈출, 정치망명 신청.
1981년~1993년 8월 미국에서 <민족학교> 설립하고 <재미한국청년연합> <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운동연합> 등 결성.
1993년 8월 수배 해제되어 귀국.
1995년 3월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2007년 6월 27일 사망.





이상은 고 윤한봉 선생의 주요 이력이다. 그를 따라다니는 문장이 더 있으니, 예컨대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35일 동안의 밀항, 한국인 정치 망명객 1호, 12년 만에 오디세우스처럼 귀환하더니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정작 미국에서보다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러운‘제 2의 망명생활’을 하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난 자, 등등.
생전에 ‘한봉이 형’이라 불렀으니 그렇게 칭하겠다. 그(가 만든 단체)의 초청으로 몇 번 미국엘 갔었다. 줄담배. 그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미국의 재미한청련 회원 사이에서 ‘변소와 휴지’로 불리던 Benson & Hedges라는 긴 이름의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식사를 한 후엔 어떤 자리를 막론하고 ‘똥가방’에서 칫솔을 꺼내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하던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좀 결벽이 심한 사내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뒤늦게 귀국한 후 연락을 드렸더니 그는 폐기종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워했다. 세상에, 호흡량이 정상인의 11% 밖에 안 돼 산소호흡기를 끼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그는 입장이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책 『운동화와 똥가방』에서도 스스로 고백했듯이 좀 ‘모질었다’. 물론 모질었던 건 그가 아니라 세상이었겠지만, 그는 동지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아니 적에 둘러싸여 거의 평생을 살았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특히 운동권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한 호오(好惡)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대표적인 것이 DJ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아니었나 싶다. 나 또한 그와는 많은 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많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운동에 바친 그의 치열성과 헌신성에는 미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김남주의 시 ‘천사1’을 읽으며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 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 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김남주,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중에서-

어느 누가 십 수 년 동안 운동화만 신거나 혹은 외출용 바지를 입은 채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이른바 ‘망명수칙’을 만들어 놓고 이를 실천했다. ‘생활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도망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제 땅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처럼 잠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고 그대로 잤다. 중세 수도사와 같은 처절하리 만큼 엄정한 자기절제를 누가 감히 흉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와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나도 해외에서 한 10년간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와 클래식 음악과 문학책을 의식적으로 멀리 해본 적이 있었다. 이른바 ‘쁘띠부르주아적’인 생활에 찌든 나를 추스르기 위한 방편이었다. 먹는 거야 다국적기업과 무관한 것으로의 대체가 가능하지만 독서를 전투적 사회과학 서적으로 국한한다는 건 고통스런 일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며 거의 매일 보던 베를린필하모니의 금빛 찬란한 지붕과 그 안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은발을 휘날리며 지휘를 했을 카라얀이 종종 나를 유혹했지만 나약해질까봐, 삶의 아름다움에 빠져 ‘혁명’을 잊어버릴까봐 스스로 금지품목의 목록에 넣었던 것이다. 무척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짓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땐 그랬다. 그래야만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찌 감히 윤한봉의 그 철저한 자기절제에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평생 촌놈이었다. 전라도 촌놈. 그의 별명인 ‘합수’가 뭔가? 합수란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모아놓은 인분 즉 오줌과 변을 일컫는 전라도 지방의 특별한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역사와 민중의 거름, 퇴비임을 자임했고 소망했다.

그가 해외운동의 중요성과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인정할 것이다. 그는 해외운동이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족자주운동의 특수한 지역운동이라는 것, 따라서 해외운동은 독자성을 가지고 특수성과 전문성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해외운동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서 하기 때문에 물적 인적으로 국내운동에 대한 지원도 해야 하고 국내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국제외교 연대운동도 해야 하는 등의 특별한 역할도 있다는 것에 유의하며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학생들에게는 더 직접적으로, 조국에서는 동료 청년학생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공부만 하고 있느냐고 힐난하며 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유학생이었던 필자 또한 ‘준비론’이나 ‘대기론’ 보다는 ‘현장론’의 입장이 옳다고 믿었기에 그와는 지역을 달리했지만 그를 늘 선배이자 동지로 생각했다.

미국에서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그 단체들을 보며 한편 부럽기는 했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했다. 후일 그가 미주 지역을 넘어서 유럽이나 일본에도 자신의 입지나 생각을 관철하고자 했던 점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각 지역의 특성과 주체를 고려하지 않은 독선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조금 더디고 문제가 있더라도 대다수 구성원의 동의가 전제된 자발성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귀국하여 ‘5·18기념재단’을 만드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가 직접 작성했던 창립선언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면 광주항쟁 3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광주가 피로써 증거한 대동단결된 하나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때문이다. 여기 일부를 인용한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님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 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님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가신님들 따라 그도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한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인데 너무 일찍 떠났다. 광주는 여전히, 아니 점점 더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광주항쟁의 계절인 오월, 그가 불현듯 그리워진다. 그의 간절한 바람대로 가신님들이 천상에서 환하게 웃고 계셔야 할텐데, 정말이지 죄스럽기 짝이 없어 더욱 옷깃만 여며진다.
한봉이 형! 이승에서 사는 동안 만나 뵐 수 있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나중에 뵈어요.

글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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